원어 항목명 | 黑友連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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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黑友連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8년 1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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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36년 3월 25일 |
최초 설립지 | 일본 |
원어 항목명 | 黑友連盟 |
1928년 1월 15일 재일 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이 재결성한 사상단체.
재일 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이 명칭을 바꿔 1928년 재결성한 사상단체이다. 원심창(元心昌)·장상중(張祥重)·한하연(韓何然)·이시우(李時雨)·하경상(河璟尙)·오치섭(吳致燮) 등 30여 명이 중심 멤버였다. 기관지 『호조운동(互助運動)』과 『흑색신문(黑色新聞)』을 발행하고 반일·반공산주의 노선을 분명히 했다.
1927년 2월 결성한 흑풍회(黑風會)가 전신으로, 1928년 1월 15일 명칭을 바꿔 흑우연맹(黑友連盟)으로 재결성되었다. 흑우연맹은 1935년 말 발생한 일본 무정부 공산당 사건으로 책임자 홍성환(洪性煥)이 검거되면서 침체를 거듭하였고, 1936년 3월 25일 해산했다.
흑우연맹은 상애회(相愛會) 등 친일파 세력과 투쟁을 벌이며, 노동자들의 권력을 보호하고자 했다. 1926년 6월 상애회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사무실을 습격해 9명에게 중경상을 입히고, 1927년 동맹 파업 파괴에 나서는가 하면 조선 자유노동자조합 회원들을 납치하고 폭력을 가하자, 이에 맞서 상애회의 행동 대장에게 물리적인 보복을 가했다. 1928년 2월 상애회 회원들이 권총과 일본도로 무장하고 흑우연맹 사무실과 기숙사를 습격했지만, 오히려 반격을 당하고 일본 검찰도 흑우연맹의 정당방위를 인정해 상애회의 만행을 폭로했다. 흑우연맹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던 공산주의 단체와도 직접적인 투쟁을 벌였다.
흑우연맹 회원들은 이른바 4대 민족 투쟁[3·1 운동 기념 투쟁, 5월 1일 노동절 투쟁, 8월 28일 국치일 투쟁, 9월 1일 간토 대지진 추도 투쟁]을 우호적인 노동 단체와 일본 아나키스트 단체들과 연대해 전개했다. 또 조선 동흥노동동맹·자유청년연맹 등과 함께 대지진 피학살자 추도 대강연회를 공동 개최하고, 일본 정부를 규탄하는 격문을 배포했다. 1934년 여름 경상도·전라도·충청남북도 등 조선 남부 지방에 큰 수재로 인해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자, 흑우연맹은 조선 동흥노동동맹·조선일반노동조합과 더불어 구호 활동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