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東京朝鮮労働組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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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京朝鮮勞動組合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도쿄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7년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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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30년 7월 8일 |
원어 항목명 | 東京朝鮮労働組合 |
1920년대 중후반 일본 도쿄도 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재일 조선인 노동조합.
초기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의 구성 단체였던 도쿄 조선노동동맹회를 대신해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산하 단체로 1927년 6월 결성되었다.
1927년 양재도(梁在道) 집행 위원장 체제 아래 5개 지부를 두었고, 회원 수는 3,090명이었다. 1928년 8월 가와사키[川崎]지부가 조직되었고, 이후 혼조[本所]지부, 세이난[西南]지부 등이 조직되었다. 1930년경까지 존속하였으며 해체 논의가 이루어지던 1929년 후반에는 조합원이 3,140명이었다.
도쿄 조선노동조합 내에는 조선 공산당 일본총국(朝鮮共産黨日本總局) 조직이 들어가 활동을 하는 등 공산당의 지도를 받았고, 고려공산당청년회(高麗共産黨靑年會) 프랙션도 설치되었다. 도쿄 조선노동조합 조직에서 특징적인 것은 쟁의 전위대 서기국에서 자위단을 조직하고 활동한 사실이다. 자위단은 “적색 테러에 대항하여 노동자, 농민을 지키고, 전쟁에 대비해 무기가 될 조직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설치되었다.
1929년 3월 29일 300여 명의 대의원과 방청객이 참석한 가운데 도쿄 조선노동조합 제3회 대회가 우에노[上野] 자치 회관에서 개최되었다. 대회 주요 의안은 태평양노동조합회의에 대표 파견, 일반 운동 방침, 제국주의 전쟁 반대, 조일(朝日)노동자 공동 투쟁, 여러 악법 철폐, 구원회 지지, 산업별 편성, 청년부 설치 및 최저임금법 획득, 민족적 특수 폭압에 관한 건 등이었다.
도쿄 조선노동조합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과 함께 대규모 선전·선동 활동과 일상적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수해 구제 운동과 국내의 민족 운동에 대한 지원 투쟁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편, 기관지인 『조선노동』을 사수하기 위해 자금 모집에 힘썼고, 지부와 반 단위에서는 『활동뉴쓰』, 『전선뉴쓰』, 『투쟁뉴쓰』를 간행해 선전과 계몽에 힘썼다.
1929년 8월 국치기념일을 맞아 23일부터 1주일간 기념일 주간으로 결정하고, 지부에서 특별 강좌를 열고 대중 계몽 활동을 벌였다. 11월 조선의 광주 학생 운동에 호응해 지원 운동을 벌였다. 1929년 12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이 조선인 독자의 노동조합 해소를 결정하면서 도쿄 조선노동조합은 1930년 7월까지 ‘해소 투쟁’에 들어갔고, 7월 8일에 해체 성명서를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