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조선인협조회

원어 항목명 京都朝鮮人協助会
한자 京都朝鮮人協助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일본 교토부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2년
원어 항목명 京都朝鮮人協助会
성격 내선융화단체
정의

1922년 일본 교토부에서 조직된 재일 조선인 내선 융화 단체.

개설

교토 조선인협조회는 1920년대 초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일본 교토 지역의 재일 조선인을 대상으로 무료 직업 소개, 무료 숙박, 순종 사망시 통곡제 개최 등을 실시하면서 일제의 지배 정책을 홍보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설립 목적

교토 조선인협조회는 회원의 상호 부조를 통해 재일 조선인 노동자의 생활과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킨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변천

교토 조선인협조회는 1920년 5월 교토시 일부 당국자의 지원을 받아 재일 조선인 유지들이 조직한 노동공제회를 전신으로 1922년 11월 15일 설립되었다. 초대 회장은 김승법(金承法)으로 추정되며, 김승법이 1923년 4월 귀국하자 총무였던 권오섭이 단체의 사업을 위임받아 운영하였다. 1927년 3월 권오섭, 홍재두, 정원식 등 반회장파가 조직 경영의 난맥상을 이유로 오타니 에쇼[大谷塋韶] 회장의 사임을 요구하였고, 교토 조선인협조회의 자금원 역할을 하던 은사재단 경복회(恩賜財團慶福會)에서는 사임 요구를 받아들여 5월 권오섭이 회장에 취임하였다. 교토 조선인협조회는 1932년까지 존속한 것으로 확인된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교토 조선인협조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노동공제회는 직물과 섬유업에 종사하는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의 상호 친목과 직업 소개를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노동공제회를 계승한 교토 조선인협조회의 활동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주요 사업은 무료 숙박, 직업 소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야학 또는 강습 등이었다. 사업을 위해 교토부, 특고(特高), 사회과, 공장과, 경찰 등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여 재정으로 충당하였다. 특히 김승법의 귀국 이후 권오섭은 경찰부장 등에게 재일 조선인 노동자 구제를 위한 사회과 교부금을 요청하였다. 권오섭이 조선인 최초의 순사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일이었을 것이다. 1924년 교토조선인기독교회와 함께 실업자 구제 사업을 전개하였고, 1925년 무료 숙박 연인원 500여 명, 직업 소개 100건 등을 수행하였고, 은사재단 경복회에서 건축비 지원을 받아 조선인협조회관을 건립하였다. 9월 교토에 거주하는 재일 조선인 1,000여 명을 초대해 점심 식사를 제공하며 오타니 에쇼 회장 및 명사들의 강연을 실시하였다. 1926년 순종이 사망하자 상애회 교토 본부와 함께 통곡제를 주최하였다.

의의와 평가

1920년대 초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교토 지역의 재일 조선인을 대상으로 무료 숙박과 직업 소개를 하는 등 재일 조선인의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단체였다. 하지만 일제의 지배 정책을 홍보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일제의 침략 정책 수행에 협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때 일본인 회장이 재임하는 등 내선 융화를 위해 활동하였던 단체이다.

참고문헌
  • 김인덕, 『식민지 시대 재일 조선인 운동 연구』(국학자료원, 1996)
  • 김동명 외, 『일제 강점기 재일 조선인 단체 편람』(민족문제연구소, 2010)
  • 「朝鮮人労働者に関する状況」[1924](『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1, 三一書房,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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