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京都朝鮮労働同盟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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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京都朝鮮勞動同盟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교토부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0년대 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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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항목명 | 京都朝鮮労働同盟会 |
성격 | 노동단체 |
1920년대 초 일본 교토 지역의 재일 조선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조직된 노동 운동 단체.
교토 조선노동동맹회는 1920년대 초반 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노동자에 대한 구제 활동, 노동 문제에 대한 연구 활동,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 활동, 재일 조선인 보호 활동 등을 통해 교토 지역 조선인 민족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1925년 이후의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교토 조선노동동맹회는 일본 교토 지역 조선인 노동자들의 단결과 국제적 연대 활동을 통해 계급적, 민족적 이익을 관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교토 조선노동동맹회가 조직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925년 2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결성 때 교토 조선노동동맹회도 가입한 것으로 보아 최소한 1925년 2월 이전에는 창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조직의 변천을 보여 주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1925년 3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간부들이 교토 조선노동동맹회 회관에 노동연구사를 설치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회관을 소유할 정도로 기본 자산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교토 조선노동동맹회의 활동을 보여 주는 자료에 1925년 자료가 많으므로 교토 조선노동동맹회가 활발하게 활약한 시기를 1925년 전후로 추정할 수 있다. 교토 조선노동동맹회는 1925년 2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하였으며, 교토 조선노동동맹회 안에 ‘구제회’를 설치하였다. 구제회는 동정금을 납부한 자로 구성되었는데, 임시의장 이수곤, 위원 홍달룡·이정암·김종수·김관평·문종운·최찬현·유상일·유찬문으로서 1925년 4월 말까지 존속하였다. 1925년 3월에는 교토 조선노동동맹회의 회관 내에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에서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노동자도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는 ‘노동연구사’를 설치한 것으로 보아 교토 조선노동동맹회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활동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고 판단된다.
1925년 메이데이 투쟁에 참여하였으며, 9월 교토지방무산단체협의회에 가입하였다. 11월 홋카이도의 오타루[小樽]고등학교에서 조선인을 가상의 적으로 한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교토 조선노동동맹회가 가입하였던 교토지방무산단체협의회와 교토 조선유학생학우회 주최로 규탄연설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미에현에서 발생한 재일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충돌 사건에 교토 조선유학생학우회와 함께 조사 위원 3인을 파견하여 경찰에 항의하였다. 11월 30일 교토기독청년회관에서 ‘경찰당국 탄핵 연설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26년 2월 교토지방무산단체협의회가 주최한 3법안 반대 시위 운동에 교토 조선노동동맹회가 참가 단체로 등록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교토지방무산단체협의회에서 탈퇴하였거나 교토 조선노동동맹회 자체가 해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교토 조선노동동맹회는 1920년대 중반 교토 지역 조선인 중심의 노동 운동 단체로 노동자에 대한 구제 활동, 노동 문제에 대한 연구 활동,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 활동, 재일 조선인 보호 활동 등을 통해 교토 지역 조선인 민족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