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조선노동조합

원어 항목명 大阪朝鮮労働組合
한자 大阪朝鮮勞動組合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일본 오사카부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7년 4월 20일
해체 시기/일시 1930년
원어 항목명 大阪朝鮮労働組合
성격 노동운동단체
정의

1927년 일본 오사카부에서 창립한 오사카 지역의 대표적인 재일 조선인 합법 노동 운동 단체.

개설

1927년 4월 20일에 열린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働總同盟) 제3회 대회는 ‘1부현(府縣) 1조합 원칙’에 의해 조직을 지역별 일반 조합으로 개칭하고, 지부로서 도쿄[東京]·오사카[大阪]·가나가와[神奈川]·교토[京都]·고베[神戶]·추부[中部]·도야마[富山] 등에 조선노동조합을 결성키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기존 오사카 연합회[大阪聯合會] 체제를 전환해 1927년 9월 1일 오사카 조선노동조합이 탄생했다.

변천

오사카 조선노동조합은 창립 대회가 끝난 직후인 1927년 9월 3일 제1회 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서무부, 정치 교육부, 조직 선전부, 조사 쟁의부, 부인부 등을 조직한 후 본부를 니시나리[西成]지부에 설치했다. 창립 당시 오사카 조선노동조합은 북부(北部)·동북(東北)·동남(東南)·항(港)· 니시나리[西成]·사카이[堺]·센보쿠[泉北]지부를 두었고 회원수가 2,400명에 이르렀다. 주요 간부는 김달환(金達桓), 김한경(金漢卿), 김수현(金守顯), 김문준(金文準), 김영수(金榮洙), 남영우(南英祐), 박영근(朴永根), 박영만(朴永萬), 정동파(鄭東波), 위경영(魏京永) 등이었다. 오사카 최대의 합법적 단체였던 오사카 조선노동조합 임원들은 고려 공산청년회 등 관련 단체 간부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을 겸임했다. 오사카 조선노동조합은 1930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해산에 따른 후속 조치로 해산을 맞을 때까지 총 3차례[1928년 4월 23일 제2차 정기 대회, 1929년 4월 16일 제3차 정기 대회]의 정기 대회를 개최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오사카 조선노동조합의 주요 활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야학 설치 및 운영을 통한 교육운동이다. 오사카 조선노동조합은 1928년 7월 15일 오후 7시 동북지부 가모우분회[蒲生分會] 내에 가모우야학부[蒲生夜學部]를 설치하고 발회식을 거행하였다. 40여명의 학생이 참가하여 수업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는 총독폭압정치반대투쟁이다. 총독폭압정치반대투쟁은 1925년 11월 검거된 조선 공산당원에 대한 가혹 행위, 전남 완도군 소안도 소안학교 강제 폐쇄 사건 등 국내에서 벌어진 식민 통치 정책의 모순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총독폭압정치반대투쟁은 오사카 지역에서 최초로 전개되어 도쿄 등지로 확산되었다. 오사카 지역 조선인노동조합이 반일반제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 번째는 상애회(相愛會) 반대 투쟁이다. 상애회는 대표적인 동화(同化) 단체로서 사회 사업 단체를 표방하면서 1921년에 결성되어 조선인 노동자를 통제하고 이익을 추구하던 단체였다. 그러므로 조선인 노동자가 노동조합에 가입하거나 노동조합의 조직화와 확산을 극력 반대하고 방해했다. 조선인 노동자를 폭행하고, 노동자 파업을 해산하며 조선인 노동조합을 습격하는 등 폐해가 심했으므로 오사카 조선노동조합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본부와 마찬가지로 적극 대응했다.

네 번째는 조선인 탄압 철폐 운동이다. 조선인 탄압 철폐 운동은 일본 지역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에 대한 철폐 운동 외에 일본 외 지역에서 발생한 탄압에 대한 철폐 운동이 포함된다. 특히 1927년 5월부터 만주에서 재만 동포에 대한 탄압과 구축(驅逐) 사태가 일어나 조선인이 경영하는 학교를 폐쇄하거나 조선인을 타살하는 사건으로 확산되자 이에 대응해 조선에서 일어난 반대 투쟁이나 재만 동포 옹호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다섯 번째는 일본 사회 운동 참가이다. 매년 메이데이 참가는 물론 3악법반대투쟁, 일본 사회 운동 지원 삐라 살포도 중요한 활동 가운데 하나였다.

여섯 번째는 조선에서 일어난 수해를 구제하는 운동이다. 매년 반복될 정도로 잦은 수해 피해를 지원하기 위해 오사카에 조직된 조선대수재동포구원단에 참여하고 물품과 의연금을 모금해 전달했다.

일곱 번째는 노동 운동의 전개이다. 오사카 조선노동조합 활동 기간 중에 총 44건[공장 41건, 토목 공사장 3건]의 노동자 파업을 주관·지원했다. 연도별로 보면 1927년 7건, 1928년 11건, 1929년 26건에 해당한다.

여덟 번째는 조선인 거주권 투쟁이다. 당국의 퇴거 집행과 집주인의 부당한 퇴거 요구, 땅 주인의 주택 철거 등에 맞서 거주권을 확보하는 투쟁이다. 히가시오사카차가인동교회[東大阪借家人同交會], 오사카차가인동맹본부[大阪借家人同盟本部], 정내차가인유지(町內借家人有志) 등의 조직과 함께 연대 투쟁 방식으로 전개했다. 그 외 조선 공산당 공판과 간도 공산당 공판 지원 활동이나 원산(元山) 총파업 지원 등의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대부분의 활동은 지역 단체 및 관련 단체와 연대 투쟁의 형식으로 전개했다.

의의와 평가

오사카 조선노동조합은 1920년대 중반에 활동한 오사카 지역의 대표적인 조선인 합법 노동운동단체였다. 조선인 노동 운동을 주도하고 주택 분쟁 등 생존권 투쟁을 전개했으며, 일본 사회 운동 단체 및 조선인 사회 운동 단체와 연대 투쟁 방식으로 지속적인 반일 민족 운동을 전개했다. 오사카 조선노동조합의 주요 구성원들은 1930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해산 이후에도 조선인 협동조합 운동을 주도하고 일본노동자전국협의회에 가입해 조일 연대 투쟁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참고문헌
  • 정혜경, 『일제 시대 재일 조선인 민족 운동 연구』(국학자료원, 2001)
  • 梁永厚, 『戰後·大阪の朝鮮人運動』(未來社, 1994)
  • 「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 第三回大會 宣言, 綱領, 規約(1927年 4月 20日)」(『在日朝鮮人史硏究』1, 在日朝鮮人運動史研究会, 緑蔭書房, 1977)
  • 朴慶植, 「在日朝鮮勞總の活動」(『在日朝鮮人: 私の靑春』, 三一書房,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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