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화회

원어 항목명 協和会
한자 協和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일본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3년 이후
원어 항목명 協和会
정의

1923년 관동 대지진 이후 재일 조선인의 통제와 억압, 황민화를 추진하기 위해 일본 전국에서 조직된 일제 협력 단체.

개설

1920년대 조선인 도항 인구가 증가하면서 사회 문제도 증대되었다. 재일 조선인의 실업 문제, 인권 유린 문제 등이 일본 내에서 사회 문제가 되면서 대책을 강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발생 이후에는 재일 조선인 사회의 여론이 크게 동요되었다. 조선인 학살을 은폐하고 융화를 내세우면서 특별고등경찰 내선계는 명목상 조선인을 구제하기 위한 조직 결성에 나섰다. 이 시기를 전후해 결성된 친일 단체 상애회, 출신 지역 중심의 친목회 등은 직업 알선과 더불어 일본 사회와의 융화라는 명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924년 오사카부 내선협화회, 1925년 가나가와현 내선협회, 1925년 효고현 내선협회가 결성되었다. 내선협화회와 내선협회 등의 조직들은 조선인의 보도(補導), 감시, 동화를 주요 사업으로 하였지만 재일 조선인들의 낮은 호응으로 인해 유명무실한 단체가 되었다.

설립 목적

1931년 만주 사변을 계기로 다시 조선인 통제의 필요성이 고조되었다. 1934년 각의에서는 「조선인 이주 대책의 건」을 결의하였고, 재일 조선인 대책에 있어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이후 오사카부 내의 각 경찰서 단위로 조선인의 통제와 황민화를 위한 조직이 설립되고 오사카부 내선융화사업조사회가 결성되었다. 1936년 내무성은 지방 장관에게 협화 사업의 실시요지를 통달하였고, 재일 조선인 인구가 많은 8개 부현에 예산이 배당되었다. 각 부현 경찰이 중심이 되어 내선협회, 내선협화회 등의 조직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졌다. 1939년 전국적으로 만들어진 조직들은 협화회라는 명칭으로 통일되었고, 중앙협화회가 총괄하였다.

변천

일제 강점기 말경인 1944년 11월 중앙협화회가 중앙 흥생회로 개칭하였다. 하지만 중앙 흥생회 조직 상부에 특별고등경찰이 자리하는 것은 변함없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중앙협화회는 1939년 6월 28일 설립 총회를 개최하고 이사장으로 세키야 데이사부로[關屋貞三郎]를 내세웠다. 조직 구성은 전국 각 경찰서에 지부, 지부장은 서장, 책임간사는 특별고등경찰 내선계가 담당하였다. 경찰의 활동 상황과 방침은 『특고월보』에 게재되어 당시 조선인 통제 현황을 알 수 있다. 협화회는 조선인의 동향 감시, 도항 귀국 관리, 거주자 조사, 황민화 정책의 전파 등을 담당하였다. 지도원으로는 일본인 지역 유력자, 보도원으로는 일본어를 아는 조선인 유력자가 역할을 맡았다. 모든 조선인은 의무적으로 회원이 되어야 하였고, 사진이 들어간 협화회 수첩을 발급받았다. 수첩을 지참하지 않으면 조사를 받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조선으로 강제 송환되기도 하였다. 강제 동원 노무자에게도 수첩은 발급해 주었지만 도주를 우려해 본인이 소지할 수 없도록 하였다. 협화회는 재일 조선인에게 일본어와 일본의 전통 예절과 풍습을 배우고 익히도록 하였고, 국기 게양, 신단 설치와 참배, 국민복 장려 등 황민화 사상을 주입시켰다. 재일조선인은 각 마을 단위로 결성된 도나리구미[隣組]에 의무적 참여, 공출과 방공 훈련, 징병, 지원병 및 전시 노동에도 동원되었다.

현황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10월 4일 특별고등경찰은 폐지되고, 흥생회 또한 해체되었다.

의의와 평가

협화회 및 흥생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던 일부 조선인 유력자는 해방 이후 친일 부역자로 조선인 사회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김동명 외, 『일제 강점기 재일 조선인 단체 편람』(민족문제연구소, 2010)
  • 히구치 유이치, 『협화회: 일제하 재일 조선인 통제 조직』(정혜경 외 옮김, 선인, 2012)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