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부 내선협화회

원어 항목명 大阪府內鮮協和会
한자 大阪府內鮮協和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일본 오사카부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4년 5월 5일
개칭 시기/일시 1935년 10월
원어 항목명 大阪府內鮮協和会
성격 내선융화단체
정의

1924년 일본 오사카부에서 재일 조선인들의 보호와 구제, 선도와 교화를 목적으로 설립된 관민 합동 단체.

개설

1923년 관동 대지진이 발생한 이후, 조선인이 일본인의 우물에 독을 넣고 타고 방화를 하였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다.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본인들이 조선인 학살을 저질렀지만 일본 정부는 공식적인 사죄는 전혀 없이 학살을 은폐하고, 재일 조선인을 무마할 방책을 구상하였다.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는 조선인 거주자가 5만 명에 이르는 오사카부에 대책을 지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직된 것이 관민 합동 단체인 오사카부 내선협화회[오사카부 협화회]였다. 내선협회가 최초로 설립된 오사카에서는 해마다 1만 명 가까운 조선인 인구가 증가하였다. 오사카에 이어 가나가와현, 효고현 등에서도 내선협회가 발족하였고, 야마구치현에서도 조선인 보호 구제 사업이 실시되었다. 오사카부 내선협화회는 1935년 10월 오사카부 협화회로 개칭되었다.

설립 목적

오사카부 내선협화회의 설립 취지를 보면 구직 및 거주에 어려움이 있으므로 가장 시급히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공동 숙박소, 직업소개소, 야학교, 진료소 등의 기관을 세우는 것이 주요 사업으로 되어 있다. 오사카부 내선협화회에서 벌이는 사업이 지향하는 바는 동포의 복리를 증진하고 이를 통해 내선융화의 결실을 얻는 것이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재일 조선인의 일본 거주와 정착에 도움을 주고, 양 민족간의 융화를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설립된 협화회 단체들이 재일 조선인 생활 개선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숙박소와 진료소가 병설된 형태의 직업소개소, 야학교는 조성하였지만 규모도 작고, 설비도 부족하였다. 당시 일본의 사회사업은 허울에만 그친 것이 많았고, 재일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사업에서 더욱 심한 상황이었다. 노동 현장이나 입주시 차별을 받는 것이 일상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행정적인 시정이 내려진 것이 아니라 사회사업을 통해 재일 조선인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것으로 보이고자 한 것이다.

가나가와현 내선협화회의 경우, 실업 구제와 일자리 알선 등 실질적인 목적보다 조회, 국민체조, 황거요배, 어가낭독, 수신가 연습 등 국민적 신념을 높이는 행사가 성공적인 것이라고 보고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허울 뿐인 사업 내용 외에도 협화회의 구성 역시 재일 조선인의 구제보다 통제에 더욱 경도된 형태였다. 이사 7명 중 2명이 경찰부장과 특별고등과장이었고, 하부 기관 평의원 35명 중 5명이 경찰서장으로 협화회는 경찰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조직이었다.

또한 친일 단체인 상애회와 공호사에서 조선인 평의원 각각 1명씩이 선출되어 내선 사업의 일부를 담당하게 하였다. 표면적인 목적으로는 재일 조선인의 보호 구제를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재일 조선인의 동화와 교화를 통해 감시하고 억압하는 정책을 펼친 것이다. 경제 불황과 세계적인 공황이 일어나자 협화회 사업은 더욱 쇠퇴하고, 사업을 위한 모금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에 재일 조선인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단체가 나타나 명목 뿐인 협화회의 정책과 잦은 충돌을 빚게 되었다.

참고문헌
  • 정혜경, 「오사카[大阪] 한인 단체의 성격[1914~1922]」(『한일관계사연구』4, 한일관계사학회, 1995)
  • M·リングホーファー, 「相愛会: 朝鮮人同化団体の歩み」(『在日朝鮮人史硏究』9, 緑蔭書房, 1981)
  • 塚崎昌之, 「一九二〇年代, 大阪における「内鮮融和」時代の開始と内容の再検討: 朝鮮人「救済」と内鮮協和会·方面委員」(『在日朝鮮人史研究』37, 緑蔭書房, 2007)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