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労働階級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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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勞動階級社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도쿄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32년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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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33년 1월 |
원어 항목명 | 労働階級社 |
성격 | 조선 공산당 재건 조직 |
1932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출판 활동을 위장해 결성된 재일 조선인의 조선 공산당 재건 조직.
1932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설립되었으며, 조선의 노농 대중에 대한 계몽적 출판 활동을 주로 전개했다. 출판 활동을 통해 조선 공산당을 재건하고자 했다.
김치정(金致廷)[1906~1936, 이명은 김치정(金致楨), 이재환(李在煥), 이철수(李鐵秀), 이명수(李明洙), 한명수(韓明洙), 김철(金鐵)]은 1930년 1월경 조선 공산당 재건을 위해 상하이로부터 도쿄에 잠입했다. 다시 1930년 12월 조선 정세 파악을 위해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재건투쟁협의회를 결성하고, 노동자 농민에게 계급 의식을 환기시키기 위해 이해하기 쉬운 문서를 작성하여 교육하는 ‘사상적 계몽’을 급무로 활동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출판물 단속이 심해 일본에서 ‘계몽적 출판사’ 조직과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 일본출판부 결성, 그리고 일본 공산당과의 연계 및 지지, 원조라는 세 가지 사명을 띠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
1931년 2월 도쿄에서 김두정(金斗禎), 문용하(文鏞夏), 함용석(咸龍石), 박경호(朴景鎬) 등과 함께 무산자사(無産者社) 간부 김삼규(金三奎)와 회원 김두정, 송연수(宋演壽), 황학노(黃鶴老) 등과 함께 무산자사를 통해 활동을 전개하려 하였다.
무산자사 회원이 대거 체포되자, 1931년 10월 조선의 노농대중에 대한 계몽적 출판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새로이 노동계급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창립 준비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했다. 1) 무산자사를 해체하고 새롭게 노동계급사라는 출판사를 결성하고 『노동계급(勞動階級)』을 발행한다. 2) 노동계급사 결성 준비를 통괄하는 임시 기관으로 임시상임위원회를 두고 책임은 김치정이 맡는다. 3) 임시서기국을 설치하고 책임자는 김치정, 국원은 김두정, 한봉석(韓鳳石)으로 한다.
1932년 1월 1일, 김치정, 김두정, 문용하, 함용석, 박경호, 김선필(金善泌), 유봉섭(柳鳳燮), 김봉점(金鳳點) 등은 노동계급사를 조직했다. 김치정 등은 동성사(同聲社) 내에 본부를 두고, 노동계급사 내 중앙상임위원회 산하에 서기국, 조직부, 편집부, 재무부, 출판부 등 각 국/부를 설치하고 규약을 결정하였다. 핵심 인물인 김치정은 중앙상임위원회원 서기국원을 겸한 간부를 맡았다. 초기 임원 구성은 서기국[김두정], 서기부[이복만(李福萬)], 조직부[박경호], 재무부[문용하], 편집부[김두정], 출판부[윤기청(尹基靑)] 등이었다. 1932년 말 이후 관련 인물 대부분이 검거되었을 때 알려진 임원 구성은 중앙상임위원회[김치정, 송연수, 김두정, 윤기청, 문용하, 한승격(韓承格)], 서무부[김두정], 재무부[송연수], 편집부[조은수], 출판부[윤기정]이었다. 중앙의 국과 부 외에도 기존 노동조합의 지역별 단위가 있었던 고토[江東], 주부[中部], 조호쿠[城北], 조세[城西]에 각 반이 설치되어 반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6월 20일 김치정의 「노동계급사 창립에 제하야 노동자빈농 및 근로대중제군에 선언함」 등을 게재한 『노동계급』 창간 준비호가 발행되었다. 발행 즉시 발매 금지 처분을 당했으나 약 1,000부를 인쇄하여 일본 및 조선 각지로 발송, 배포하였다. 또한 『노동계급』 임시호 200부와 윤봉섭이 입수한 「조선사회운동약사코스」 50부를 인쇄해 배포하였다. 한편 1932년 5월 초 노동계급사와는 별도로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 일본출판부를 비밀결사로 결성하고 출판 활동을 전개했다. 김치정이 책임자, 결의 기관으로 중앙집행위원회, 중앙상임위원회를 두고 『재건투쟁』이라는 출판물을 발행하였으며, 집필 편집은 김두정, 재정은 문용하, 조직은 함용석, 출판물 배포는 박경호가 각각 담당했다. 1932년 7~8월경 다음 사항을 협의하였다. 1) 일본에서의 조직 활동은 우원(迂遠)하고 조선의 공산주의가 수차례의 검거로 현저히 혼란스럽고 통일되지 않고 있으며 이에 노동 대중은 극도로 피폐하니 통일적 지도가 필요하다. 2) 가급적 조속히 조선으로 돌아가 조선에서의 재건 활동에 집중하면서 일본 및 중국의 공산당과 긴밀히 연계해야 한다. 3) 조선 전역을 중부, 영남, 호남, 관서, 관북의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 각지 활동을 담당해야 한다.
이후 1932년 9월 29일 노동계급사 전체대회를 열어 노동계급사와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 두 조직을 모두 해체하고 조선에서의 당 재건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1933년 1월까지 김치정을 비롯한 중심 인물 대부분이 검거되면서 사실상 이들의 조선 공산당 재건 운동은 조선에서의 본격적 활동을 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노동계급사는 1932년 1월에 설립하여 2년 정도 유지되었지만, 일제 강점기 재일 한인 노동 운동과 민족 운동에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