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黑濤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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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黑濤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1년 11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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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일본 도쿄도 |
원어 항목명 | 黑濤会 |
1921년 11월 29일 일본 도쿄도에서 결성한 최초의 재일 조선인 사상단체.
1921년 11월 29일 갑호 요시찰 인물인 아나키스트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의 일본 도쿄 집에서 에스페란토 공부를 빌미로 20여 명이 모여 모임을 결성했다. 경찰의 급습을 받아 해산당하였다. 회원은 조선인 고학생 동우회 회원이던 박열(朴烈)·정태성(鄭泰成)·원종린(元鍾麟)과 유학생인 백무(白武)·김약수(金若水) 등 30~35명에 이르렀다. 연령층은 20대 초반이 주류를 이루지만, 20대 후반과 30대 초반도 있다. 회원들의 직업은 일부 유학생을 비롯해 노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고학생, 그리고 자유 노동자와 무직자 등이다.
흑도회는 어느 특정 이념이나 명망가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직업과 활동 경력을 가진 재일 조선인들의 연합적 사상단체로 출발하였다. 단체명과 지도 인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나키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흑도회 회원들은 1922년 4월 1일 조선의 ‘내정 독립과 참정권 획득’에 반대하는 강연회를 개최하고 일본노동총동맹이 주최한 세계 노동절 행사에도 참여하였다. 나아가 1922년 7월 10일 기관지 『흑도(黑濤)』[발행인 박열] 창간호를 내고 8월 10일 제2호를 발간했다. 이어 1922년 여름 니카다(新潟)현 나가쓰가와(中津川)에서 한인 노동자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동아일보사 기자 등이 현지조사를 벌이자, 박열 등 흑도회 회원들도 별도의 조사 활동을 벌였다. 흑도회는 9월 7일 도쿄의 간다[神田] 청년 회관에서 학우회와 공동 주관으로 당국을 비판하는 연설회 등을 개최했다. 이 행사는 일본 경찰이 강제 해산 조치를 하고 일부 한인이 연행당하기도 했지만, 도쿄에서 한인 주최로 양심적 일본인들이 대거 참여해 성황을 이루는 성과를 거두었다. 학살 사건 진상 조사와 규탄 대회, 『흑도』의 발행은 흑도회를 재일 한인 사회를 비롯해 일본·조선 사회 단체, 그리고 일본 사법 당국에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학살 사건 조사와 규탄 대회 준비 과정에서 박열과 김약수 양측 간의 의견 대립이 생겨났다. 박열은 노동자 학살 사건과 같은 식민지 현실과 자본주의의 ‘나쁜 제도’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인 직접 행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