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北星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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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北星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3년 1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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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25년 1월 3일 |
원어 항목명 | 北星会 |
1923년 1월 15일에 출범한 공산주의 계열의 재일 조선인 사상단체.
재일 조선인의 첫 사상단체인 흑도회(黑濤會) 멤버 중 김약수(金若水)·김종범(金鐘範)·백무(白武) 등이 1922년 11월 아나키스트들과 분화하여 공산주의 성향의 단체를 결성하였다. 1922년 12월 26일 도쿄[東京] 시내에서 회합하여 단체 이름을 북성회라 하였다. 북성회에 가입하고자 하는 자는 회원 다수가 증명하도록 하거나 찬성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입회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1923년 1월 15일 안광천(安光泉)·이여성(李如星)·변희용(卞熙瑢) 등 60여 명으로 정식 출범했다. 이후 북성회 회원들은 도쿄는 물론 오사카[大阪]·교토[京都]와 훗카이도[北海島] 등지에서 한인 노동 단체를 조직하고 일본 사회주의 단체인 ‘무산자동맹회’에 참가해 국제 연대를 꾀하였다. 북성회는 송봉우(宋奉瑀)의 주관 아래 1923년 3월 기관지 『척후대(斥候隊)』와 『전진(前進)』을 창간해 10호까지 발행했다.
주요 강령은 한국과 일본 프롤레타리아의 연대와 결합, 재일 한인 노동자의 단일한 대조합 창설 등이다.
북성회 멤버들은 국내에서 순회강연회를 열어 사회주의 사상과 노동 운동을 선전하였다. 간토 대지진[關東震災]때에는 재일본 조선 노동자 조사회, 도쿄 조선노동동맹회, 일본 노동 총동맹의 원조를 받아 이재(罹災) 동포를 조사하고 위문 활동을 벌였다. 1923년 11월 모임에서는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진상 발표와 피해자 유족 생활 보장 등을 요구하였다. 이어 『동아일보』에 실린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에 대한 반대 투쟁도 전개했다.
북성회는 이후 활동 거점을 조선으로까지 확대하고 건설사(建設社)에 이어 1924년 11월 사상단체 북풍회(北風會)로 확대 조직하였다. 북풍회의 회원 40명 중 공산당원은 5명에 이르렀다. 북풍회는 국내 다른 사상단체와 달리 일본 무산 정당, 특히 일본 프롤레타리아와 밀접히 제휴할 것을 강조했다.
한편 안광천·이여성 등 일본에 잔류한 북성회 회원들은 노동자 등 대중과의 연계를 바탕으로 한 계급 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에 1925년 1월 3일 북성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일월회(一月會)를 결성했다.
사회주의 운동 초기에 일본에서 결성되어 조선 국내에 공산주의 보급에 큰 역할을 한 사상단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