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在日義勇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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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在日義勇兵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원어 항목명 | 在日義勇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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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발발한 6·25 전쟁에 파견된 재일 한인 의용군.
재일의용병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6·25 전쟁에 파견된 재일 한인 의용군을 가리킨다. 재일의용병은 대부분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재일학도의용군이라고 불렀다. 1950년 일본에 있던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재일한교지원병(在日韓僑自願兵)이라고 불렀다. 6·25 전쟁 개전과 동시에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조국 방위를 위한 군사적인 협력에 대해 협의를 시작하였고 한국 주일대표부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유엔군과 작전을 수행하면서 통역과 안내를 담당할 요원이 필요하였던 연합국최고사령부의 요청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허가를 받은 주일대표부가 전면에 나서 모집을 전개하면서 본격적으로 의용군 파견 운동에 돌입하였다.
재일의용군은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 한인을 대상으로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요구하는 조건을 갖춘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청년 및 대학생을 중심으로 총 642명이 모집되었고 훈련은 미국과 한국이 각각 담당하였다. 의용군 파견은 연합국최고사령부의 지도하에 한국 정부, 주일대표부, 일본 정부 등이 상호 긴밀히 협력함으로서 실현되었다. 재일의용군은 유엔군 혹은 한국군에 편입되어 총 5차례 6·25 전쟁에 참여하였다. 재일의용군은 주로 인천상륙작전, 원산상륙작전, 평양탈환작전 등 연합 작전에 투입되었다.
재일의용군은 총 파견자 642명 중 전사자 135명, 일본 귀환자 265명, 미귀환자[한국 잔류자] 242명이 발생하였다. 재일의용군은 파견 당시 전쟁 이후에 대하여 연합군 최고사령부와의 확실한 약속 없이 6·25 전쟁에 참전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일본으로의 재입국 문제, 대학생 복학 문제, 전사자 유가족의 원조 문제, 부상자 치료 문제, 급여 미지급 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1951년 11월 5일 재일의용군 생존자와 유족들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일본지회[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가 조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