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역사/근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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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1945년 8월 일본 패전 이후 일본 공산당이 혁명 운동에 재일 한인들을 결합시키기 위하여 취한 정책 노선.
일제 강점기 코민테른의 일국 일당 노선은 일본의 공산주의 운동에도 관철되었다. 일본 공산당은 식민지의 해방을 내걸고 당 중앙에 민족부를 설치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에 거주하던 많은 재일 한인 공산주의자는 일본 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으로 일본 공산당은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45년 11월 제4회 당 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전국협의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김천해(金天海)는 제4회 당 대회 준비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새롭게 설치된 ‘조선인부’의 책임자가 되었다. 12월 개최된 일본 공산당 제4회 당 대회에서 김천해는 7인의 중앙위원, 5인의 정치국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이처럼 많은 재일 한인이 전전부터 전후에 걸쳐 일본의 좌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일본 공산당 당원의 상당수가 재일 한인이었다.
한편 일본의 패전 직후 재일 한인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지키기 위하여 1945년 10월 재일본조선인연맹을 결성하였다. 일본 공산당은 ‘조선 지부’를 설치하여 재일본조선인연맹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9년 9월 일본 정부와 GHQ에 의해 재일본조선인연맹이 강제로 해산되자 일본 공산당은 민족대책부를 설치하여 재일 한인 운동을 지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946년 2월 제5회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원 후보로 뽑힌 김두용(金斗鎔)은 1946년 3월 『전위』창간호에서 “재일 한인의 과제는 귀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자신들의 생활을 옹호하기 위한 투쟁의 일부로 일본 공산당의 목표에 협조하자.”라고 주장하였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 공산당은 당의 민족대책부 회의를 열어 조선방위중앙위원회를 결성하였는데 조선방위중앙위원회는 이후 1951년 1월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으로 이어졌다. 1951년 2월 일본 공산당은 제4회 전국협의회를 개최하여 한반도의 전쟁 상황을 이용하여 일본 내의 공산주의 혁명을 완성하기 위한 무장 투쟁 노선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공산당은 일본의 혁명 없이는 재일 한인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으므로 재일 한인은 일본 혁명에 결합하고 협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재일 한인 공산당 당원들은 당의 방침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과격 투쟁에 참가하면서 다수가 체포되었다. 그러자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은 무력 투쟁 노선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한덕수(韓德銹)는 일본 공산당 운동과 결합한 형태가 아니라 북한과 결합한 형태의 재일 한인 운동론[=노선 전환]을 제시하며,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을 해산하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본 공산당 당적을 가지고 있던 재일 한인들은 일본 공산당을 떠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