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타마

원어 항목명 琦玉
한자 琦玉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원어 항목명 琦玉
GPS 좌표 https://www.google.co.jp/maps?hl=ko&biw=1536&bih=819&q=%E5%9F%BC%E7%8E%89%E7%9C%8C%E5%B7%9D%E5%8F%A3%E5%B8%82&bav=on.2,or.&dpr=1.25&um=1&ie=UTF-8&sa=X&ved=0ahUKEwi2yJ3B7ZPRAhWGGJQKHZaQClAQ_AUIBigB
성격 재일한인 집거지
정의

재일 한인이 대거 거주하고 있는 일본 수도권의 간토 지방에 있는 현.

개설

도쿄도, 지바현, 가나가와현과 함께 수도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일본 간토 지방에 있는 현이다

형성 및 변천

사이타마현[埼玉縣]은 고대부터 한반도와 관련이 깊은 지역이다. 716년에 고구려 유민에 의해서 무사시노구[武藏國]에 고마군[高麗郡]이 신설되었는데, 현재의 히다카시[日高市], 한노시[飯能市] 일대였다고 추정된다. 근대부터는 본격적으로 한반도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사이타마현 요선사[了善寺]의 본당 옆에는 김옥균이 심었다고 알려진 녹나무가 솟아 있다. 1923년 9월에는 관동 대지진이 발생했는데, 사이타마현은 도쿄에 인접한 현 남부부터 동부에 걸쳐서 피해가 극심했다. 지진이 발생한 직후,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 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사회주의자가 폭동을 일으켰다.”라는 등의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이러한 유언비어는 도쿄로부터 피난 온 사람들에 의해서 사이타마현에도 확산되면서 사이타마현에서도 재일 조선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조선인 학살 희생자의 규모는 기록에 따라 다른데, 지진이 발생한 지 50년 후에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최소 193명에서 최대 240명으로 추산하였다. 그리고 신원을 알 수 없는 희생자가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시에는 사이타마현에도 강제 연행되어 온 조선인들이 고다마[兒玉] 비행장, 오미야 나카지마[大宮中島] 등의 건설 현장에 투입되었다.

전후에도 본국의 정세 불안, 생활상의 불안정 등으로 인해서 일본에 거주하게 된 재일 한인이 약 60만 명에 이르렀고, 사이타마에도 재일 한인이 거주하였다. 이들 중 다수가 언젠가 본국에 돌아갈 것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의 문화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여 민족 학교를 설립했다. 1946년에는 5월에는 조선어 강습소가 오미야[大宮], 가와구치[川口], 가와고에[川越], 도다[戸田] 등지에 설립되었고, 1948년에는 사이타마 제1·제2 초급 학교가 민족 학교로 설립되었다.

현황

사이타마현에는 2015년 15,548명의 재일 한인이 거주[등록]하고 있으며, 주요 집거지를 보면 도다시에 700여 명, 와라비시[蕨市]에 380여 명, 가와구치시에 2,4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주요 단체로는 사이타마 한국상공회의소[埼玉韓国商工会議所], 재일본대한민국부인회 사이타마 지방본부[在日本大韓民国婦人会 埼玉県地方本部], 재일본대한민국청년회 사이타마현 지방본부[在日本大韓民国青年会 埼玉県地方本部] 등이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 『埼玉と朝鮮: くらしの中から考える』(『埼玉と朝鮮』編集委員会, 1992)
  • 江藤善章, 『こんなにも深い埼玉と韓国·朝鮮の歴史』(新幹社, 2014)
  • 사이타마현(https://www.pref.saitama.lg.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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