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 대지진

원어 항목명 関東大地震
한자 關東大地震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일본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3년 9월 1일
발생|시작 장소 일본 도쿄도|일본 치바현|일본 사이타마현|일본 가나가와현|일본 군마현|일본 이바라키현 등
원어 항목명 関東大地震
성격 자연재해
정의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도와 가나가와현을 포함한 관동 지역에서 일어난 지진.

역사적 배경

1920년대 전반 일본은 하나의 큰 시대적 전환기에 직면하였다. 밖으로는 코민테른의 활동이 동아시아에 미쳐 한국·중국의 민족 해방 운동이 격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안으로는 공황으로 노동 운동·농민 운동·부락 해방 운동이 사회의 저변을 뒤흔들었다. 또한 일본의 군부와 국가주의자들은 과격사회운동취체법 제정을 시도하고, 탄압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때 일어난 대지진으로 민중이 공황 상태로 빠지자 일본 군부와 군국주의자들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민중의 보수적 감정을 이용하였다.

경과

1923년 도쿄를 비롯한 관동 지방은 지진으로 인하여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흉흉해진 민심으로 인해 일반인들 사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싹텄다. 일본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 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하였다. 내무성의 지시에는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보도되었고 보도 내용에 의해 더욱더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신문에 실림으로서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 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라는 헛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하였다. 유언비어는 일본인들에게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을 유발하였다. 곳곳에서 민간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불시 검문을 하면서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가차 없이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자경단은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였고,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조선인들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 조선인에게 “십오 엔 오십 전(十五円五十銭)”을 말하게 해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였다.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 피신하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서 안까지 쳐들어와 끄집어 내어 학살하였다. 학살된 조선인들이 도쿄의 스미다강과 아라카와강에 버려져 강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결과

일본 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를 공식 확인하였으나, 피해자의 수를 축소 발표하고, 자경단 일부를 연행, 조사하였다. 하지만 형식상의 조치에 불과하였으며 학살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사람이나 기구는 전혀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에 의하면 학살된 조선인은 6,661명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 『독립신문』(1923. 12. 1)
  • 『大正大震火災誌』(警視庁, 1925)
  • 朴慶植, 『日本帝國主義の朝鮮支配』(靑木書店, 1973)
  • 『關東大震災と朝鮮人虐殺』(現代史出版會, 1975)
  • 『大正の朝鮮人虐殺事件』(鳩の森書房, 1980)
  • 『現代史資料』6(みすず書房, 1963)
  • 松尾尊允, 「關東大震災下の朝鮮人虐殺事件」上·下(『思想』471·476, 1963. 9, 1964. 2)
  • 姜德相, 「関東大震災における朝鮮人虐殺の実態: 特に四十周年を記念して」(『論集日本歴史』12,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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