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원어 항목명 教育
한자 敎育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원어 항목명 教育
정의

해방 후 재일 코리안들의 민족 교육.

민족교육의 모태

해방 후 재일 조선인들의 귀국 열기가 고조되어 갔을 때 귀국 준비를 하고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는 ‘국어 강습회’가 각지에서 열렸다. 일본 전국 600개 소에 이르고 약 6만 명의 아이들이 거기에서 배웠다. 선생도 교사도 교재도 없는 가운데, “지혜있는 자는 지혜를, 힘있는 자는 힘을, 돈있는 자는 돈을”을 표어에 기운이 높아져 민족의 말을 되찾는 민족 교육이 시작되었다. 1946년경이 되면 돌아가야 할 조국의 불안정한 정세를 알게 되어 잠시 귀국을 보류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임시 ‘국어 강습회’를 체계적인 민족 교육을 위한 학교로 발전시켰다. 1946년 초등 학원 525개, 청년 학교 10개교가 설립되어 교원 수 1,100명, 아동·학생수 약 4만 2천 명이 등록하였다. 그러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와 일본 정부는 이 같은 민족 교육을 일본의 학교 교육법을 무시한 ‘치안 문제’로 파악하였고, 마침내 1948 년 1월 24일에 문부성 학교 교육 국장은 각 도도부현 지사 앞으로 ‘조선인 설립 학교의 주의 사항’을 통보하였다. 취지는 일본의 학교 교육법에 근거하지 않는 민족 학교를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족 교육의 자주적 운영을 지키려는 재일 조선인과 그것을 폐쇄하려는 일본 당국의 충돌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한신교육투쟁과 재일한인사회

민족 교육과 일본 당국과의 충돌이 정점에 도달한 것이 1948년 4월 24일, 오사카와 고베를 중심으로 하는 ‘한신 교육투쟁’이었다. 한신 교육투쟁에 의해 오사카와 고베에서 다수의 중경상자가 나온 것 뿐만 아니라 민족교육을 지키는 운동을 지원한 일본인을 포함하여 다수가 검거되었다. 이 운동의 와중에 오사카에서는 김태일 소년이 사살되는 불행한 사건도 일어났다. 일본 정부는 그후 민족 학교에 대한 폐쇄 조치를 취하였다. 민족 학교 폐쇄에 대한 각 지역의 대응은 제각각 일본 당국과의 대화로 공립 학교의 분교로서 존속된 곳, 공립 학교 속에 민족 학급을 설치된 곳도 있었다. 한신 교육투쟁의 수습책으로 오사카부 지사는 재일 조선인 단체 대표와 양해 각서를 체결하며 공립 학교에서 방과 후에 일정한 민족 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인정하고 30여 개가 개설되었다.

현재 오사카부 이외에도 가나가와현·아이치현·교토부·효고현·후쿠오카현 등에 있지만 학급 자체의 제도적 보장, 강사의 신분 보장 등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민족 학급은 공립 학교에 재학중인 한국·조선인 아동 학생의 민족 교육의 기회로 마련된 과외 학급으로, 민족 클럽 모국어 학급, 모국어 교실이라고도 한다. 재일 코리안 아이들을 주요 대상으로 하고 한반도의 언어와 문화, 역사 등을 교육하고 있다.

조선학교와 민족교육

민족 학교의 대부분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계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조선 학교이다. 오늘날 운영 모체는 각지의 학교 법인 조선학원이며, 각종 학교의 인가를 취득해 한국어와 역사, 문화를 교육 과정 특징으로 하는 민족 교육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민족 학교라고도 불린다. 2010년 기준 홋카이도에서 후쿠오카까지 73 개교가 있고 대학교, 고급 학교, 중급 학교 초급 학교, 유치원까지를 망라한 6·3·3·4 년제의 교육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재일대한민국민단계 민족 학교는 전일제로는 현재 도쿄 한국 학교, 금강학교, 건국학교, 교토 국제학원 등 4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춘기·하기 학교나 수학 제도를 통해 지금까지 많은 재일 한국인 학생들에게 모국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참고문헌
  • 『역사 교과서 재일한국인의 역사』(아카시 서점, 2006)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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