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영문 Sports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정의

일본에서 활약했거나 활동하고 있는 재일 한인 출신 운동인과 주요 스포츠 분야.

개설

스포츠는 재일 한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포츠는 재일 한인이 일본 사회의 민족 차별 속에서 사회적으로 그 차별을 극복하고 한인이 성공할 수 있었던 분야였다. 1960년대 이후 재일 한인 스포츠 선수들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스포츠 분야에서도 재일 한인 선수들이 활약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스포츠 선수이자 예능인으로 유명한 추성훈[秋山成勲, 아키야마 요시히로]이 있다.

재일 한인의 스포츠 진출 배경

재일 한인이라는 출신 때문에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사회적 제도에 의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스포츠는 이러한 제약이 약했던 분야였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재일 한인이 활약한 스포츠 분야는 격투기, 야구, 축구 등이였다. 격투기는 레슬링, 프로레슬링, 유도, 복싱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일본 고교 야구나 프로 야구의 인기 속에서 많은 재일 한인 선수들이 활약하였고, 한국 야구계에 진출하여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다. 축구에서도 재일 한인 선수와 재일 한인으로 구성된 팀이 활약하였다.

격투기

프로레슬링에서는 역도산(力道山), 조슈 리키[長州力]와 마에다 아키라[前田日明] 등이 활약하였다. 특히, 역도산은 1952년 미국으로 건너가 295승 5패라는 성적을 거두었고, 1953년 일본으로 귀국한 역도산은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를 설립하였다. 역도산이 거구의 서양인 레슬러를 쓰러뜨리는 모습은 일본에 희망을 주었고, 일본의 국민적 영웅으로 평가받았다. 유도에서는 많은 재일 한인이 한국 대표로 활약하였다. 1964년 도쿄올림픽의 중량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여 한국 유도계에 첫 메달을 가져다준 김의태(金義泰)를 시작으로, 1972년 뮌헨올림픽 은메달 오승립(吳勝立) 등이 있다. 오승립의 은메달이 뮌헨올림픽 대회 한국선수단 유일한 메달이었고, 오승립은 재일 한인 최초로 스포츠 국민 훈장인 석류장을 받았다. 한국 유도가 아직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할 시기의 의미 있는 성과였다. 최근에는 한국 대표로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했으나, 재일 한인에 대한 차별문제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추성훈(秋成勳)이 있다. 이후 종합 격투기 선수로 전향하였으며, 추성훈이란 이름으로 한국의 예능 프로에도 다수 출연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 내 재일 한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도 엿볼 수 있다. 그 외 격투기에서는 공수도의 오야마 마스타쓰[大山倍達]나 자신의 뿌리를 밝히고 활약한 복싱의 도쿠야마 마사모리[德山昌守, 홍창수]가 있다. 도쿠야마 마사모리는 WBC 슈퍼플라이급에서 재일 한인 최초로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야구

야구에서는 통산 3,085안타의 기록을 남긴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勳, 장훈]와 400승 투수의 가네다 마사이치[金田正一], 고시엔[甲子園] 준우승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로 활약한 니우라 히사오[新浦壽夫], 히로시마[廣島]에서 투수로 활약한 후쿠시 히로아키[福士敬章, 장명부] 등이 있다. 후쿠시 히로아키는 일본 야구계를 거쳐 1982년 창설된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활약하였는데, 30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다. 이 외에도 가네무라 요시아키[金村義明], 히야마 신지로[檜山進次郎], 가네모토 도모아키[金本知憲], 아라이 다카히로[新井貴浩], 긴조 다쓰히코[金城龍彦] 등이 자신이 재일 한인 출신임을 밝히고 활동하였다. 가네모토 도모아키는 히로시마와 한신[阪神]을 거쳐 활약하였는데, 연속 이닝 출장과 연속 경기 풀이닝 출장 부분에서 세계기록을 가지고 있다.

축구

축구에서는 1961년 결성되어 ‘일본 최강의 축구 클럽’이라고 불렸던 재일조선축구단에서 많은 선수들이 배출되었다. 1993년 일본 J리그가 출범하였다. 김종성(金鍾成)이 1995년 주비로 이와타에 입단한 것을 시작으로 많은 선수들이 재일조선축구단과 민족 학교를 통해 J리그에 진출하였다. 이후 안영학(安英學)과 이한재(李漢宰) 등 J리그에서 활약하는 민족 학교 출신들이 잇달아 북한 대표로 활약하였다. 또한, 한국의 K리그에서 활동하는 선수도 생겨났다. 2000년 재일 한인 최초로 성남 일화에서 뛴 박강조(朴康造)는 시드니올림픽의 한국 대표로도 선발되었다. 베르디 가와사키를 거쳐 2001년 한국 울산현대로 이적한 양규사(梁圭史)는 K리그에서 활동한 최초의 조선 국적 선수가 되었다. 정대세(鄭大世)는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당시 44년 만에 출전권을 획득한 북한의 중심 선수로 활약하였다. 이후, 한국의 K리그에서도 활약하였다. 본명으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 베이징올림픽에 일본 대표 선수로 출전한 재일 한인 4세 이충성(李忠成)[리 다다나리] 등의 재일 한인 스포츠 선수도 등장하고 있다.

과제: 차별과 변화

조선 고교생 인터하이 출전 문제와 같이 재일 한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회 참가를 인정하지 않았던 시기도 있었다. 시민 사회의 차별에 대한 반대 야구 운동과 일본 스포츠계 문호 개방에 따라 재일 한인들의 스포츠 환경도 점점 변화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점차 재일 한인의 대화 참가가 허용되었고, 프로 야구와 J리그에서도 오랫동안 재일 한인 선수들을 배제해 오던 운영 체제가 바뀌고 있다.

참고문헌
  • 이태신, 『체육학 대사전』(민중서관, 2000)
  • 『재일코리안사전』(정희선 외 옮김, 선인, 2012)
  • 조정민,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스포츠 문화: 재일 조선인 프로레슬러 역도산을 중심으로」(『일본연구』37, 중앙대학교 일본연구소, 2014)
  • 신무광, 「태극 마크를 가슴에 새긴 최초의 자이니치 코리안 ‘인터뷰’- 박강조」(『Four Four Two』56, 미디어윌 M&B,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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