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移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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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移住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원어 항목명 | 移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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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부터 현재까지 재일 한인이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별 양태.
한반도를 떠나 살고 있는 재외 한인은 약 720만 명에 달한다. 이광규는 1965년을 기준으로 이전의 이동을 구이민으로 이후를 신이민으로 구분하고 있다. 일본으로의 이주는 구이민에 해당하며, 구이민은 시기적으로 나라가 어려웠던 시기 한반도를 둘러싼 이웃 나라로 이주가 대부분이다. 특히 일본으로의 이주는 식민지 이전부터 이주한 올드커머와 1989년 해외여행 자율화 이후 이주한 뉴커머의 이주로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일 과정을 크게 4단계로 구분하여 1단계인 생존형 초기 이주[1910~1938년], 2단계 강제 연행기[1939~1945년 8월], 3단계 일본 내 고착기[일본 패망 이후~1988년], 4단계 뉴커머 유입기[1989년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910년을 전후한 도일은 유학생과 정치 망명가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 강점기 이후 이주한 사람은 일본의 노동 시장을 대체할 노동자 계급의 이주가 대부분이었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 확립이라는 명목하에 진행된 토지 조사로 인하여 토지를 박탈당하고, 산미 증산 계획으로 일본 본토를 위한 식량 공급지가 되었다. 이로써 조선 농촌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고, 더 나은 생활을 위하여 일본으로 도항하는 사람이 급증하였다. 일제의 조선 강점이 30년도 채 되지 않은 1938년도 재일 조선인의 수는 거의 80만 명에 육박하였다.
조선인의 강제 연행은 1939년부터 시작되었다. 연행 방식은 1941년 모집 방식, 1943년부터 1943년까지는 관주선 방식,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징용 방식으로 차츰 강압적으로 변하였다. 강제 연행기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수는 약 72만 명에 이르며, 일본 국내는 물론 남사할린, 남양군도로 연행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탄광, 토목건축, 공장, 항만 하역, 노장으로 보내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조선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210만 명에 달했던 재일 조선인은 해방 직후 하카타, 시모노세키, 센자키 등으로 몰려들었고, 약 140만 명의 재일 조선인이 귀국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불안한 정치·경제적 혼란으로 귀국을 주저한 사람들이 일본에 정착하였다. 그 수는 60만 명에 달하였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기까지 일본으로의 이주는 밀항에 의한 것이었다. 이 시기 밀항의 원인은 정치적, 경제적 이유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인의 밀항은 1960년대 초반까지 1000건대를 기록했지만, 1963년 한일 협정 이후 1,000건 이하로 감소하였다. 일본 입국 관리 사무소와 경찰, 해상 보안청 세 기관이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1970년대까지 불법 입국자의 97%가 한국에서 온 것으로 밝혀졌다.
1985년 미국과 일본 간의 플라자 합의 이후 엔고 현상과 일본의 경제 호황, 1989년 출입국 관리법 개정으로 일본으로 입국하는 외국인이 급증하였다. 1989년 한국에서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면서 유학생과 취업 준비생 신분으로 입국하는 한국인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연이어 일어난 1997년 한국의 외환 위기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 이주하였고, 일본의 E-JAPAN 전략에 따라 한국의 IT관계 기술자가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최근에는 경제 활동을 위해 자발적으로 이주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