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在日朝鮮人の伝統と変容の現場ー冠婚葬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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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원어 항목명 | 在日朝鮮人の伝統と変容の現場ー冠婚葬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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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재일 한인의 생활과 문화 속에 전해지는 관혼상제의 전통.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를 전후하여 급격하게 증가한 한인들의 일본 도항은 단지 인구의 이동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전통과 생활 문화를 일본의 이주 지역에 정착시키고 계승하고자 하는 활동과 함께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활동은 일본이라는 이문화의 장과 시대적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 지속적으로 탄압과 동화, 수용과 변용의 상황을 감내해야 했으며, 한민족 고유의 전통에 대한 고수와 회유, 계승과 억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일 한인들에게 있어서 한민족의 생활 문화와 전통은 단지 일상성의 문제를 넘어서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지키고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특별한 의미를 내재한 기재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일본의 생활 문화나 전통과의 혼용이나 변용은 진행되면서도 여전히 한민족 고유의 생활 문화와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는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실제로 재일 한인의 생활 문화와 전통 속에서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구축하고자 하는 양상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특히 재일 한인들이 지키고 계승하고자 하는 한민족의 생활 문화와 전통은 재일 한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고 있는 의례 속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의례는 인간의 일상생활을 규정함과 동시에 비일상의 관념을 규정하는 중층적인 의미를 함유한다. 따라서 의례를 지키고 계승하는 사람들은 일상성은 물론 시공간을 초월한 비일상적 경험을 통해 일체감과 연대감을 공유하며 자신들의 사회적·문화적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동시에 고수하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재일 한인 사회의 의례 또한 정주지 일본의 생활 문화와 전통의 영향을 받으며 변용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이른바 한국적인 요소와 일본적인 요소가 혼용 또는 절충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정주지 일본에서 주변인 혹은 경계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재일 한인들의 필요에 의한 취사선택의 결과이며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재일 한인 사회의 의례는 이미 100년 이상의 시대가 흐르면서 재일 한인 1세와 2세는 물론 3세와 4세 간에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각각의 의례에 대한 의식이나 가치관도 크게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는 세대 간의 차이와 함께 상업주의의 침투와 확산 등도 재일 한인 사회의 의례에 대한 의식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는 실정이다.
통상 성인식으로 일컬어지는 관례는 현재 일본적인 요소가 가장 농후하게 지배하는 의례 중의 하나이다. 현재 한국에서 관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실정이지만 일본에서는 성인의 날은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어 성인이 되는 당사자에 대해 각 가정은 물론 지방 자치 단체나 기업, 그 외 각종 단체에서 축하 의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일본의 성인식은 매년 1월 둘째 주 월요일에 이루어진다. 과거에는 성인식을 맞이하는 남녀는 각각 성인의 머리 모양을 하고 의례를 위한 의복을 갖춰 입었다. 그러나 근대화 이후 단발이 일상화되고 혼례와의 경계가 애매해지면서 과거의 일본 전통 의례로서의 성인식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성인식은 일본 패전 이후 각 지자체 등에서 성인식을 맞이한 청년들을 축하하고 격려하며 기념품을 주거나 각 지역의 신사에 참배하는 정도의 행사로 탈바꿈하였다. 재일 한인 사회의 관례도 일본의 이와 같은 관례 문화가 그대로 수용되었으며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비롯한 재일 한인 단체들이 각각의 성인식 행사를 치르고 성인식을 맞이한 청년들을 격려하고 성인으로서의 자각을 촉구하는 행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관례는 당사들에게 한민족임을 인지시키는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확인이라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재일 한인의 일본 정주가 오래된 만큼 재일 한인 사회의 혼례 또한 일본의 전통 혼례 요소를 상당히 수용한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세대 간의 결혼관, 배우자의 국적, 혼례의 거행 장소 등에 따라 다양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도일한 재일 한인 1세의 경우는 같은 한반도 출신의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측면이 강하며 실제로 1세들의 결혼의 주류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와는 달리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을 받은 재일 한인 2세와 3세들은 일본인과의 접촉이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일본인 배우자에 대해서도 1세들의 결혼관과는 다른 사고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재일 한인 1세와 2세, 또는 3세들 사이에는 결혼 문제에 있어서 각기 다른 의식과 결혼관을 드러내며 갈등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즉 배우자의 선택과 혼례의 거행 장소, 혼례 관련 물품의 준비 등의 문제에서 주된 갈등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재일 한인의 혼례는 일본 전통 혼례의 요소를 다양하게 수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재일 한인 사회의 혼례에 있어서 재일 한인 2세의 경우는 1세에 비해 일본인과의 교류가 증가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인과의 접촉도 일상화되면서 결혼 배우자로서 일본인을 선택하는 경우도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재일 한인 1세와 2세 간 갈등 요인의 하나로 등장하기도 하였으며 재일 한인 사회의 큰 이슈로까지 대두되었다. 그리고 재일 한인 3세, 4세에 이르러서는 일본인 배우자의 선택이 한인끼리의 결혼보다 자연스러운 양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다니 토미오에 의하면 재일 한인 사회에서 한인끼리의 결혼은 1974년 기준으로 50% 이하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김경득 등에 의하면 1991년 기준으로 재일 한인의 연간 결혼 건수는 약 9,000여 건이며 그중에 80~85% 정도는 일본인 배우자와의 결혼이라는 통계가 있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재일 한인의 결혼관의 변화는 배우자의 선택뿐만 아니라 혼례의 절차와 형태 등의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1세들의 경우는 연애결혼의 수보다는 중매결혼의 수가 훨씬 많으며 중매인을 통한 지역 내 출신자와의 지역 내혼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재일 한인 2세, 3세부터는 중매결혼과 함께 연애결혼도 급격히 늘어났으며 동시에 일본인 배우자를 선택하는 경향도 급증하였다. 혼례의 절차를 살펴보면 재일 한인 1세들의 경우는 주로 신붓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2세의 결혼식은 도심 지역의 협소한 주택 사정으로 주례 혼례 전문의 식당이나 결혼식장 등에서 거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3세들의 결혼은 경제 발전과 결혼 산업의 발달로 전문 결혼식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재일 한인 1세들의 경우는 혼례식이 끝난 후 폐백, 큰절, 초야 등의 절차를 비교적 지키며 진행된 반면 2세 이후에는 혼례식 이후 피로연을 통해 하객들과의 인사나 축하의식을 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절차로 굳어졌다. 재일 한인 사회의 혼례식도 일본의 전통 혼례 방식을 부분적으로 채택하며 변화하고 있으며 특히 신랑과 신부 중 어느 한쪽이 일본인인 경우는 일본식 혼례 절차를 부분적으로 채택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예를 들면, 하객들에 대한 오가에시[보조금의 일부를 하객에게 물품이나 금전으로 돌려줌]라든가 오이로나오시[결혼식 진행 중에 행해지는 연회에 따라 의상을 세 번 갈아입는 의식] 등이 그것이다.
재일 한인 사회의 의례 중에 가장 한국적인 전통 의식이 남아 있을 법한 의례가 상례이겠지만 이 상례 또한 일본의 정책과 관련되어 일본화되거나 불교적인 의식으로 변화되어 진행되고 있다. 원래 상례는 고향을 떠나온 재일 한인들의 마지막 통과 의례인 만큼 고인의 뜻을 존중하여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며, 한국 전통 장례의 양식과 절차를 따르고 유지하고자 하는 경우도 다수 보고되어 있다. 재일 한인의 장례에서 일본인들의 장례와 다른 점은 유체의 수습과 처리 과정이다. 일본인의 경우는 현재 약 98% 이상이 화장을 실시하고 있다. 재일 한인 1세들의 상당수는 유체를 화장하여 유골만을 묘지나 납골당에 안치하는 것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는 경우도 자주 있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도시 거주 재일 한인들은 거주 환경의 협소와 주변 주민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불가피하게 화장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대부분은 화장으로 바뀌었다. 그 가운데 일부 제주도 출신의 재일 한인 중에는 유체를 제주도의 고향 마을까지 운반하여 토장을 하는 경우도 다수 확인되고 있다. 재일 한인의 장례의 가장 큰 특징은 현대 일본식, 유교식, 무속식이 혼합된 양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유교식이나 무속식은 거의 사라지고 일본식의 장례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지고 있지만, 유교식에서는 가족이 장례의 주체가 되어 우제 등을 거행했으며, 무속식에는 무속 의례 전문가인 심방이 주체가 되어 거행된 경우도 있었다. 재일 한인 사회의 장례는 한반도의 출신지의 장례 문화와 일본의 장례 문화가 혼용된 양상을 띠고 있으며, 일본식 장례를 수용할 경우 장의사는 재일 한인이 운영하는 장의사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장례 또한 한국식 의례를 많이 채택하는 편이다. 그러나 재일 한인이 운영하는 장의사는 도쿄나 오사카와 같은 대도시에 한정적이며 지역 농어촌 지역의 재일 한인은 일본인 장의사를 통해 부분적으로 한국의 장례 의례 일부를 채택하게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묘지의 설치에 관해서는 한반도의 고향에 묘를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나 최근에는 일본 내의 조선사(朝鮮寺)나 일본의 절에 유골을 안치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일본 내의 정주 인구가 많아지면서는 일본 내에 묘지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묘지의 형태는 일본인의 묘지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묘비의 측면에 집안의 족보를 새겨 넣거나 묘비명으로 본명이나 통명을 사용하는 경우도 다수 확인된다. 또는 가족 중에 조부모는 본명으로, 부모는 통명으로 하는 등 재일 한인 사회의 복잡한 심경이나 처지를 반영하기도 한다.
재일 한인 사회의 의례 중에서도 가장 한국적인 요소가 남아 있는 의례는 제례이다. 제례는 한국적인 유교식 의례를 통해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또한 강화하는 작용을 함과 동시에 집안의 사적인 내력을 전승 유지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례 또한 의례의 절차와 의미를 인지하고 있는 재일 한인 1세와 제례에 대한 경험이 없는 2세, 3세들에게는 이질적인 문화로서 인식되는 경향도 나타나면서 다른 의례들이 그러하듯 세대 간 갈등의 요소를 안고 있는 의례이다. 그리고 재일 한인 1세들 중에 한국의 고향에 묘지를 설치한 경우와 일본 내에 묘지나 납골당을 설치한 경우에는 제례의 수행 양상이 다소 차이가 나기도 한다. 아울러 제례의 수행은 결혼 문제에 있어서 배우자가 일본인인 경우는 더욱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또한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제례를 위한 음식 준비 등의 문제가 대두되어 제례의 간소화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런 한편에 일부의 문중을 중심으로 전용 묘지의 조성을 통해 엄격한 제례 의식을 수행하고자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재일 한인 사회의 제례는 장례 이후의 소상과 대상, 기제사와 명절 제사로 구분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재일 한인 사회에 있어서 한국의 전통적인 출산 의례는 재일 한인 1세와 2세의 경우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마저도 최근에는 거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예를 들면 임신을 했을 경우의 금기 사항이나 출산 후의 금기 사항을 지키고 계승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다만 아이를 출산한 이후는 돌상이나 돌잡이상을 마련하여 아이의 장래를 가늠하거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의식은 다른 출산 의례에 비해서는 자주 이루어지고 있다. 재일 한인 사회 출산 의례의 특징에도 일본의 전통 의례 양상이 자주 확인된다. 예를 들면 시치고산의례[여자아이인 경우는 3세, 7세에, 남자아이인 경우는 3세, 5세에 기모노나 정장을 입히고 신사에 가서 참배를 하는 의식], 히나마쓰리[3월 3일에 행해지는 여자아이의 성장과 건강을 축복하는 행사], 고이노보리[5월 5일에 행해지는 남자아이의 건강과 입신 출세를 기원하는 행사] 등이 재일 한인 사회에도 자주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