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생활·민속/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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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재일 한인을 통해 야키니쿠와 오코노미야키가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일본 요식업계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현상.
일본에서 본격적인 육식 문화가 보급된 것은 쇄국 정책이 막을 내리고, 근대 문명이 시작되는 메이지기 이후부터이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소·돼지의 내장과 부속물 및 정육을 섭취하는 식문화가 일찍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일 병탄 이후 1920년대부터 도일 조선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일본에도 조선인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가 되면 일정 규모 이상의 조선인 공동체를 중심으로 조선 시장이 발생했다. 조선 시장에는 김치, 막걸리, 수육 등의 식자재를 판매했다. 조선 시장은 “두부, 무, 배추, 삶은 순대, 콩나물을 조선 옷을 입은 조선 부인들이 판매”하였고, “다듬이돌, 빨래방망이, 뒤주, 궤 심지어 요강”까지 구비하였을 정도로 조선의 일반 장터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일본 최대의 오사카 이카이노 조선 시장을 탐방한 기사가 작성되기도 했다.
시장의 정경 묘사 중에서 식육점에 대해서는 다음처럼 자세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누구나 처음으로 오사카시[大阪市] 히가시나리구[東成區] 이카이노[猪飼野]에 있는 가장 대표적인 조선 시장에 가보면 아닌 게 아니라 눈에 거슬리는 광경이 더러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점포가 크고 수가 많은 것은 수육상[獸肉商]이다. 수육이라니 정육(精肉)이 아니라 우돈(牛豚)의 두(頭)·족(足)·내복(內腹) 등이다. 10여 년 전에는 버렸던 내지인들이 이 조촐지 못한 것을 먹기 시작하였으니 우돈의 내장의 고가이란 말할 수 없다. 내지인으로 이 작업을 시작하야 다소 돈량이 모힌 사람들도 더러 있다.”[송지문, 『조광(朝光)』, 1939년 2월호]라고 소개하였다. 인용한 기사에서 보듯이 조선 시장에서는 소·돼지의 정육보다 내장 및 껍질과 근육 등의 부속물이 더 많이 거래되었다. 이물질이 있어서 처리에 손이 많이 가는 내장을 일본인들은 거의 취급하지 않았다. 육식 문화가 오래되지 않았던 일본에서는 정육 중심의 소비를 하였으므로 버려지는 나머지 부위를 조선인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하였다. 숙성시켜 유통하는 정육과 달리 내장은 단기간 내 소비해야 했으므로 조선인이 주소비층인 조선 시장을 중심으로 유통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패전 후 극심한 식량난 시기가 되자 내장 및 부속물도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조선인 중매인과 행상은 도살장에서 내장을 매입해 암시장에 유통시켰다.
일본인 중에서도 일부는 근대 이전부터 내장을 섭취했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보편화된 것은 패전 이후 암시장을 통해서였다. 전후 심각한 식량 부족 상황에서 내장은 물자 통제 이외의 품목이었다. 암시장에는 조선인들이 즐겨먹는 내장을 재료로 한 탕·국·조림·볶음 등이 판매되었다. 내장은 좋은 단백질 공급원으로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어 크게 인기를 얻었다. 재일 한인들은 암시장 포장마차, 혹은 거주지의 마을 주민을 상대로 집에서 영업을 하기도 했다. 내장구이와 함께 직접 만든 막걸리·소주 등의 밀조주도 함께 팔았다. 암시장 시기를 거쳐 오늘날 야키니쿠[燒肉: 고기구이] 전문 식당으로 발전한 재일 한인 1세대 창업주들의 영업 형태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식재료로서의 내장을 통칭하는 호루몽(ホルモン)이란 일본어는 첫째, 독일어의 호르몬(hormon), 둘째, 일본어의 호루모노[放るもの: 버리는 것] 두 가지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의학 용어인 호르몬 어원설은 풍부한 영양가를 가진 내장이 건강에 좋다는 인식 때문으로 보이고, 호루모노는 일본인들이 먹지 않고 버리는 식재료라는 인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만 이 기원에 대한 설명은 전후 야키니쿠 붐이 일면서 보강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들은 내장을 ‘똥창’이라는 속어로 불렀다. 한국 전쟁 특수를 누린 일본이 고도 성장을 이룩하는 1960년대가 되면 호루몬 요리는 정육 중심의 야키니쿠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쟁 이전에도 도시 이외의 지역에서는 정육 요리가 흔한 것은 아니었다. 전시기에는 통제로 인해 도시 지역조차도 육류 요리는 보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정육의 가격 통제는 1949년에 해제되어 1950년대나 되어야 일상적인 식재료가 되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패전 이후부터 몇 년 동안은 내장류가 대체 재료로서 활용되었고, 내장류 취급에 능한 재일 한인들이 요식업 진출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야키니쿠의 어원에 대한 설도 여러 가지이다. 일본어 사전을 보면 야쿠니쿠 단어 그 자체로는 ‘소·돼지 등의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것’으로 되어 있고, 요리 방법의 의미로 ‘고기를 석쇠·프라이팬 등에 굽는 것. 보통은 조선 요리의 야키니쿠를 말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요리로서의 야키니쿠가 ‘조선 요리’의 일종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한국에서는 고기구이라는 용어보다 불고기, 갈비구이, 등심구이, 삼겹살구이, 곱창구이 등 재료와 조리 방식에 따라 명칭이 다르므로 이를 정확하게 번역하기는 어렵다. 야키니쿠라는 일본식 이름은 역으로 한국어의 ‘불고기’가 그대로 번역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설도 1970년대 중반에 등장한 것으로 야키니쿠가 보편화된 이후에 보강된 설명으로 보인다. 야키니쿠는 해방 이전 일본의 조선 요릿집 메뉴에서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야키니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단품으로 제공되기보다 한정식 요리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최초로 정육 위주의 야키니쿠를 팔기 시작한 곳은 오사카의 식도원으로 알려져 있다. 창업자인 임광식은 해방 후 일본으로 밀항해 1948년 냉면을 주 메뉴로 한 식당을 개업했다. 정육 통제가 풀린 이후인 1950년대 초반부터 식탁 위에 화로를 올려놓고 고기를 구워먹도록 했다. 오사카 최대의 암시장이었던 쓰루하시 시장 최초의 야키니쿠집으로 알려진 쓰루이치는 1948년 돼지고기 수육점으로 개업했지만 1950년대 초반 야키니쿠 식당으로 전환하였다. 두 곳 다 식탁에 화로를 두거나 설치해 고기를 구워 먹게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야키니쿠 조리법의 원조라 할 수 있다. 도쿄에서는 명월관이 해방 직후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야키니쿠를 판매했다. 하지만 명월관도 창업 초기에는 ‘똥창집’으로 유명했으므로 호루몽에서 야키니쿠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1960년대에는 본격적인 야키니쿠 붐이 일어났다. 기존의 호루몽 식당들이 야키니쿠로 전환하거나 혹은 병행 메뉴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야키니쿠 식당은 중화요리점처럼 일본 요식업계에서 민족적 특질이 뚜렷한 산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 경과에 따라 일본 업자들도 수익성이 좋은 야키니쿠 사업에 참여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대기업이 야키니쿠 프랜차이즈 사업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고, 해외 지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야키니쿠 식당은 일본 요식업계에서 당당한 ‘시민권’을 획득한 업종이 된 것이다. 야키니쿠 식당의 확산은 새로운 파생 산업을 창출하기도 했다. 식품업체 에바라는 야키니쿠 전용 양념을 발매하면서 매출고가 크게 올랐고, 고기를 구울 때 나는 연기를 빨아들이는 무연 로스터도 야키니쿠업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발명품이다. 2000년대 이후 일본 전국적으로 야키니쿠 식당은 약 2만 곳 정도, 전체 매상은 1조 엔에 달할 정도로 요식업계의 주요 업종이 되었다. 재일 한인이 운영하는 야키니쿠 식당에서는 김치도 같이 판매하였는데, 차별의 상징이던 김치가 일본인이 즐겨먹는 반찬으로 부상한 것은 야키니쿠 산업의 확대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 외 냉면, 비빔밥, 찌개 및 탕류, 전 등도 일본 외식 문화에서 크게 호평받는 메뉴로 부각되었다. 일본의 대형 패스트푸드 식당에서도 이런 메뉴를 판매할 정도로 일본인의 일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한편 전후 암시장에서 새롭게 각광받게 된 일본 음식으로 오코노미야키[お好み焼き]를 꼽을 수 있다. 오코노미야키는 ‘좋아하는 것[お好み]을 구워 먹는다[焼き].’는 의미로 밀가루 반죽에 양배추와 각종 채소, 어패류, 육류등을 올려 철판 위에서 파전처럼 구운 다음 소스, 마요네즈, 파래가루 등을 뿌려먹는 음식이다. 오코노미야키는 일본의 전통적인 음식이 아니라 근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던 1920년대에 등장한 음식인 돈돈야키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돈돈야키는 밀가루 반죽에 고기를 얹어 구워 먹는 형태였는데 크기가 작았고, 술안주나 밥반찬으로 먹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오늘날 대중적 요리인 오코노미야키가 화류계 음식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당시 도쿄 긴자의 문화를 다룬 기사에 오코노미야키가 등장하는데 이 시기 오코노미야키 식당은 순수한 음식점이라기보다 화류계 여성들이 남성을 접대하는 풍속업소로 묘사되었다. 가격 및 접근성에서 현재와 같은 대중적인 음식이 된 것은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반 사이였다. 아사쿠사의 소메타로가 한 장의 가격을 5전으로 책정함으로써 다소 고급 음식 이미지가 있었던 오코노미야키를 대중친화적인 음식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식량을 비롯한 각종 물자는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대중 음식으로서의 오코노미야키는 전후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식량 사정이 열악했던 전후에는 기본 재료 중 양배추 양이 늘어나고 각종 재료를 혼합한 형태로 오코노미야키가 발전했다. 오코노미야키의 원형은 도쿄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이지만 전후에는 오사카 암시장의 포장마차에서 크게 인기를 얻어 오코노미야키는 오사카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판매되는 오코노미야키는 오사카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편 히로시마도 오코노미야키를 대표적인 지역 음식으로 내세우고 있다. 원자 폭탄 투하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에 오사카와는 다른 방식의 오코노미야키를 파는 포장마차촌이 암시장의 명물이 된 것이다. 히로시마에서는 반죽에 국수를 추가해 오사카와는 다른 방식의 오코노미야키를 발전시켰다. 반죽과 혼합물만으로 조리되었던 오코노미야키에 소스와 마요네즈로 맛을 더하는 방식도 전후에 개발된 것이다. 오코노미야키 위에 소스를 뿌리는 것은 1948년 농후 브라운 우스터 소스 발매, 1952년 오코노미야키 전용 소스 발매 이후 보편화된 것이다. 1953년에는 오사카의 보테쥬우 식당이 카운터 형식의 테이블을 선보였고, 오코노미야키에 우스터 소스 외에 마요네즈를 추가하였다. 1965년 보테쥬우의 도쿄지점 개설,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통해 오코노미야키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야키니쿠와 오코노미야키는 패전 이후 일본의 음식문화를 바꾼 대표적인 한국계 음식이다. 오코노미야키는 전쟁 이전 일본 사회에서 인지도가 미미하지만 일반 대중에게 어느 정도 알려진 음식이었던 반면, 한국식의 야키니쿠는 일반 대중과 전혀 접점이 없었던 음식이었다. 하지만 패전 이후 이 음식들은 일본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식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두 음식의 공통점은 첫째, 전후 극심한 식량 사정 속에서 암시장을 통해 전파되고 형성된 아이디어 음식이라는 점, 둘째, 196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전국적 확산이 되어 현재 일본 요식업계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 패전 이후 암시장에서 파생된 음식들 중 대중의 기호에 맞았던 음식이 자리잡게 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음식의 역사적 배경은 전혀 그 궤를 달리한다. 전쟁 이전부터 원형이 존재했던 오코노미야키에 비해 야키니쿠가 일본 사회에 정착되는 과정은 재일 한인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재일 한인 특유의 식재료인 마늘과 이를 사용한 김치는 조선인 멸시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마늘을 양념으로 사용하고 김치와 함께 곁들이는 야키니쿠의 보급은 단순한 식문화 확대의 차원을 넘어 한일 양국의 역사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