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해방을 꿈꾸다-재일 한인의 민족 운동과 교육 투쟁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정의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민족 해방과 민족 교육을 위해 투쟁한 재일 조선인의 활동.

개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민족 해방 운동은 물론, 중국, 노령, 일본, 미주 등 조선인이 이주했던 곳이라면 방식은 달라도 목적은 동일한 성격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0년대는 본격적인 의열 투쟁과 더불어 일본과 중국에서도 활발한 운동이 전개되었던 시기였다. 그중에서 일본에서 합법적인 대중 조직으로 결성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노총]은 이를 대표하는 단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25~1931년 시기 재일 조선인 민족 해방 운동은 대부분 사회주의계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주도 세력의 흐름을 보면 일월회→조선 공산당 일본부→조선 공산당 일본총국→‘재건 고려 공산청년회 일본부’·무산자사·‘일본출판부’로 이어지고 있다. 1920년대 중후반 재일 조선인 민족 해방 운동에 통일적 중앙 조직이 출현하였다. 이러한 조직 활동의 성과에 기초하여 지속적인 반제 투쟁이 전개되었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조직, 노동 운동에서 민족 운동으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목적은 무산 청년과 노동자의 대동단결을 도모하는데 있었고, 이헌·김상철·이지영·박장길·김길섭·지후근·김치(金治) 외 6명으로 준비회를 구성했다. 1925년 2월 22일 도쿄도의 일화일선청년회관에서 도쿄 조선노동동맹회오사카 조선노동동맹회를 비롯한 12개 단체 대표 63명 등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결성 대회가 열렸다. 강령은 “① 우리는 단결의 위력과 상호 부조의 조직으로 경제적 평등과 지식의 계발을 기한다. ② 우리는 단호한 용기와 유효한 전술로 자본가 계급의 억압과 박해에 대해 철저히 항쟁할 것을 기한다. ③ 우리는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노동조합의 실력으로 노동자 계급의 완전한 해방과 자유 평등의 신사회 건설을 기한다.” 등의 3개항이었다. 또한 ① 8시간 노동 및 1주간 48시간제의 실시, ② 최저 임금의 설정, ③ 악법의 철폐, ④ 메이데이의 일치적 휴업, ⑤ 경제적 행동의 일치적 협력을 주장으로 채택하고, 기관지로 월간 『조선노동』과 『노동독본』제1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은 이러한 투쟁과 더불어 조선 수해 이재민 구제 운동, 오타루 고등상업학교 군사 훈련 사건, 미에현과 니가타현의 조선인 학살 사건 등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탄압과 학살 사건이 발생하면 규탄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일본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동포에 대한 착취와 테러 , 조선인 사회 운동 단체 습격, 노동 쟁의 분쇄 등 앞잡이 노릇을 하는 친일 동화 단체 상애회 박멸 운동도 결성 이후부터 꾸준히 펼쳐 나갔다.

조선 총독 폭압 정치 반대 투쟁 전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반일 민족 운동 중 대표적인 것으로 조선 총독 폭압 정치 반대 투쟁을 들 수 있다. 조선 총독 폭압 정치 반대 투쟁은 1925년 11월 검거된 조선 공산당원 공판에서의 가혹 행위, 전남 완도군 소안도 소안학교 강제 폐쇄 사건 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1927년 5월 21일 소안도에서는 소안사립학교 폐교반대연설회가 개최되었다. 1927년 조선 공산당 일본부에 입당했던 정남국은 오사카에서 결성된 조선총독부 실정반대 실행위원회에 참가했다. 오사카 거주 조선인들 중 4,000여 명이 6월에 개최된 총독실정규탄대회에 참가하였고, 조선 총독 폭압 정치 반대 투쟁은 본격화하였다. 오사카 지역의 반대 투쟁은 1927년 7월과 8월의 연설회로 이어졌고, 이후 오사카 조선인노동조합이 반제 반일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계기가 됐다. 정남국은 1927년 10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귀국해 국내에서 활동을 이어 갔다. 외형적으로는 경제 투쟁을 앞세우는 노동 단체였지만 조선의 식민지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 활동은 반일 반제 투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은 1920년대 재일 조선인 대중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조합원 수는 1926년 10월에는 9,900명, 1927년 4월에 30,312명으로 증가했다. 1928년 일제 검거로 인해 일시적으로 조직이 와해되었으나 1929년 다시 재건하였다. 다만 1929년 9월,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도 방침에 변화에 일어났다. 1929년 12월 14일 개최된 전국대표자회의 및 확대중앙집행위원회에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은 해체해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에 가맹할 것, 1산업 1조합주의에 따라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재조직하고 현 조합은 투쟁 과정에서 점차 산업별 조직으로 변경할 것”을 결의함에 따라 단체의 해체가 진행되었다. 이듬해인 1930년 1~2월경 각 지부가 해체과정을 거치면서 일본 단체인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로 해소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1929년 9월 말 조합원 수는 23,530명이었으나 1930년 10월 말에는 통합된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에 2,660명의 조합원만 등록되었다. 현저히 줄어든 조합의 수치는 1930년대에도 거의 회복되지 않은 채 해산 직전의 10분의 1 수준을 유지하였다. 이는 재일 조선인 운동 전체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에 합류하여 민족 운동 전개

1920년대에 비해 1930년대는 도일한 조선인 숫자가 더욱 늘어났음에도 이렇게 조합원 수가 적은 것은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산업별 노동조합 이행 문제였다. 프로핀테른은 1921년 창립 당시부터 산업별 원칙에 따라 조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하지만 1920년대 일본 지역은 자유노동자 비중이 높았고, 반제 반일 운동이 현안 과제였으므로 산업별 조직을 꾸리기 힘들었다. 공장 노동자의 비율보다 자유노동자 비율이 높은 상황에서 그러므로 산별 노동조합은 조선인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두 번째 문제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이 해산하고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로 해소되어야 할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주요 활동가가 일제 검거된 상황에서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합류는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이에 대한 논의 과정이 충분하지 못했다. 일본 운동 세력으로 합류하는 것이 조선인 운동에서 올바른 방향이라는 지도층의 대안 제시는 별로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조선인 운동의 올바른 방향이라는 대안 또한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1930년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에 합류한 조선인들은 조선인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거나 민족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펼칠 수 없었다.

협동조합 등으로 합법적 노동운동 전개

1920년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해산은 재일 조선인 운동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여기에 1930년대가 일본 당국의 본격적인 탄압과 통제, 동화정책이 강화되면서 내부 동력이 감소되었다. 조선인을 주축으로 하는 합법적 대중운동은 축소되고, 일본 사회 운동 내 세력이나 지역 운동의 형태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합법적인 형태로 이 시기에 진행된 재일 조선인 운동의 형태 중 특이한 것은 조선인 협동조합이다. 협동조합은 소비조합, 선박 협동조합, 무산자진료소, 주택 조합 등에서 그 운동의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재일 조선인이 가장 밀집해 살았던 오사카를 중심으로 이러한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운동의 구심점은 조선인 집주 지구였고, 협동조합 운동은 생활상의 이익을 도모하는 동시에 결속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 거주 지역에서 주택을 임대할 수 없었고, 일본어에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포들끼리 모여사는 집주 지구를 형성하였다. 함께 모여 있으면 취업 정보 등의 교환도 이루어지고, 의식주 등 공통의 생활 습관을 지닌 이들끼리 이질감 없이 지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지연과 혈연을 기반으로 한 상호 부조도 이루어졌으므로 식민지 시기 적대적 차별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일본 사회에서 그나마 안심할 수 있는 장소였다. 집주 지구 내에는 먼저 정착한 이들이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고, 이들 중에서 책임감과 민족의식을 갖춘 이들은 주민들을 상대로 민족의식 고양에 나서기도 하였다.

학교 설립 등 민족 교육 운동 전개

한편 집주 지구는 조선어와 조선 역사, 문화를 가르칠 수 있는 교육의 장 역할도 수행하였다. 1930년대에는 가족을 동반한 도일이 증가하면서 아동 교육 등의 재일 조선인 2세 교육이 주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오사카시의 경우 1932년 7~17세까지의 학령 아동 7,225명 중 가운데 48% 정도는 취학하고 있었고, 이듬해에도 46.9%의 취학율을 보였다. 취학 아동이 증가함에 따라 1920년대에 이미 집주 지구에 노동조합이 학교를 세워 운영하였다. 경제난으로 미취학 아동이 늘어나면 야학과 학원을 설립하여 교육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교육열은 해방 이후 민족 학교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협동조합은 주로 경제적 이익을 위해 결성된 것이지만 조선인 협동조합은 이미 구심점을 상실한 1930년대 상황에서 조선인 운동의 새로운 방향성을 찾기 위한 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조합 운동이 그나마 합법적인 운동 수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정주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1920년대부터 역량을 쌓아온 이들이 이를 기초로 운동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협동조합은 대중적 기반이 필요하고, 기금 마련 등의 안정적인 자금 조달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료 진료는 기금 외에도 의료진도 구비해야 했다. 조선인 집주 지구는 공동 구매나 계 등으로 1920년대부터 이러한 역량을 키워 왔다. 한편으로 이러한 조합 운동이 반일 운동의 일환이라는 것은 일본 정부의 강력한 탄압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경제적 이익 추구 공동체였다면 일본 측으로서는 그렇게 통제해야 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인 협동조합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흡수한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와 관계가 있었고, 이를 주도적으로 이끌던 인물들도 사회주의 활동을 펼치던 이들이었다.

내선 융화 정책으로 상애회와 협화회 조직, 민족 운동 분열

1930년대가 되면 일본의 동화 정책은 더욱 노골적으로 강화되었다. 조선인은 피식민지인으로서 일본 사회에 동화, 종속되어야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원활하게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인의 민족적 정체성이 뚜렷한 이상 이런 동화와 종속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를 와해시키기 위해서는 집주 지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단단한 결속력을 느슨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부터 일본의 동화 정책은 꾸준하게 전개되었지만 1920년대 이후, 도일자들이 증가하면서 친일 단체인 상애회 등을 내세워 동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도하였다. 하지만 1923년 발생한 관동 대지진 이후, 동화 정책은 새로운 전기가 필요했다. 그 시기에 나타난 것이 오사카부 내선협화회였다. 이 단체는 조선인의 복리 증진과 내선 융화를 표방하였지만 이미 조선인 사이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조선인 단체들로 인해 호응도가 높지 않았고, 재정적인 지원도 빈약해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런 관변 단체들은 반일 반제 투쟁을 전개하는 재일 조선인 단체에게는 타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일본에 의한 내선 융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강화된 것은 1931년 만주 사변 발발 이후였다. 이 시기는 세계적인 경제 공황으로 인해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 취업에 대한 우려가 만연해 있었다. 일본인은 조선인이 일자리를 잠식한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국내 여론은 무마하고 일체감을 도모하기 위해 대응책 마련이 시급했다. 1934년 10월 30일 각의 결정으로 조선인 이주 대책과 실천 항목으로 조선인 이주 대책 요목이 나왔다.

전시 체제기 이후 민족 운동 위축

1930년대 중반이 되면 각 지역별로 협화회, 교풍회 등이 결성되면서 적극적인 관 주도로 내선 융화 정책이 펼쳐진다. 내선 융화 단체들은 조선의 전통적인 생활 양식을 저속하고 열등한 것으로 인식하게 하고, 일본의 생활 습관, 언어, 문화 등을 각종 강습회, 학교 등의 교육 기관을 통해 주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동화 정책, 황민화 교육을 추진하는 과정 속에 조선인의 아이덴티티를 망각하게 하고, 결속력을 와해시켜 더욱 일본에 복종할 수 있는 이들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내선 융화 정책이 조선인 집주 지구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협화회 수첩 등 일상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됨에 따라 낮은 강도로 추진되었던 재일 조선인 운동은 점점 더 입지가 좁아졌다. 한 공간 안에서도 각기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이 속출하였지만 전쟁이 확대되고, 황민화 정책이 의식주의 모든 영역에서 조선인 집주 지구를 지배함에 따라 운동의 기운은 점점 축소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참고문헌
  • 김인덕, 『식민지 시대 재일 조선인 운동 연구』(국학자료원, 1996)
  • 정혜경, 『일제 시대 재일 조선인 민족 운동 연구』(국학자료원, 2001)
  • 정혜경, 「1910~1920년대 동경 한인 노동 단체」(『한국근현대사연구』1, 한국근현대사학회, 1994)
  • 朴慶植, 『在日朝鮮人運動史: 8.15解放前』(三一書房, 1979)
  • 外村大, 「在日本朝鮮勞働總同盟に關する一考察」(『在日朝鮮人史硏究』18, 在日朝鮮人運動史研究会,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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