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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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일본 정부가 재일 한인을 비롯한 외국인에게 외국인 등록증 교부 시 지문 날인을 의무화한 제도적,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려는 재일 한인의 사회 운동.
지문 날인 거부 운동은 1980년대에 들어 재일 한인 사회에서 활발히 전개된 제도적 차별 철폐를 위한 운동이다. 일본 정부가 일본 국민과는 달리 재일 한인을 비롯한 재일 외국인에게 외국인 등록증을 교부하면서 등록증에 지문 날인을 의무화함으로써 제도적 차별 문제를 야기하였고, 이를 통해 일본 사회에서 외국인과 이민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발생시키고 있다는 이유에서 전개된 운동이었다.
일본 국내에서도 일본 국민에게 일시적으로 지문을 등록하도록 한 사례가 있다. 1955년 아이치현 경찰서가 현내에서 발생한 사건 사고 피해자의 신원 확인을 신속히 하기 위해 지문 등록 제도를 실시한 것이다. 현내 중학교 3학년 학생과 다른 현에서 아이치현으로 취업하기 위해 전입한 성인의 경우 손가락 열 개의 지문을 모두 채취했다. 이에 따라 200만 명 이상의 지문이 채취되었다. 그러나 나가노현에서 신원이 확실하지 않는 시체가 발견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아이치현 경찰 당국이 무단으로 지문 정보를 나가노현에 넘겼다. 이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자 해당 경찰 당국에 대한 책임 추궁과 함께 아이치현 주민들의 집단 지문 날인 거부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 국민에 대한 비인도적인 지문 날인 제도는 1970년에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일본 법무성은 재일 외국인에게만은 계속해서 이러한 비인도적인 지문 날인 제도를 적용시켰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에 1년 이상 재류하는 16세 이상 외국인이 거주지의 지자체 단체장에게 외국인 등록 증명서를 신청할 때, 또는 5년마다 등록 연장을 신청할 때, 등록 원표 등에 왼쪽 검지 손가락의 지문을 날인해야 했다. 지문은 모든 사람이 다르며 평생 바뀌지 않기 때문에 법무성은 1955년 이래 일본 재류 외국인을 특정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지문 날인을 거부할 경우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만 엔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었다. 이 제도의 대상이 되는 외국인 가운데 80%는 재일 한인이었다.
1979년 일본 정부는 ‘외국인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취급’의 금지나 ‘내외국인의 평등 원칙’을 정하는 국제 인권 규약의 당사국이 되었다. 국제적 흐름에 맞추어 비인도적인 차별이 계속되고 있다는 현실을 인식한 재일 한인은 지문 날인 거부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80년 9월 재일 한인 1세 한종석(韓宗碩)이 도쿄도 신주쿠 구청에서 외국인 등록 변경을 하면서 이때 의무화되어 있던 지문 날인을 거부했다. 공식적으로 처음 발생한 지문 날인 거부 사건이다. 한종석은 한국에 간다면 일본으로 재입국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지문 날인을 거부한 것이다. 재일 한인 한종석의 용기 있는 저항이 그 후 자연 발생적인 거부자의 다수 연대를 가져왔다.
특히 약 30만 명에 달하는 대량 등록 증명서 갱신 시기가 되는 1985년 이후에는 날인을 거부하는 사람이 200명을 넘어섰고 여기에 연장 신청을 보류하는 사람까지 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1983년 9월부터 시작한 100만 명 서명 운동에는 일본의 시민단체, 각계 인사, 사회 여론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이에 따라 합계 181만 명이 넘는 지지 서명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1984년 3월 ‘외국인등록지문날인 상시휴대 폐지요구 전국대표자 대회’를 개최하고 일본 국회와 정당을 방문하고 입법 청원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4년부터 1985년에 걸쳐 후쿠오카, 요코하마,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지문날인 거부자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는 판결이 내려졌다. 외국인 등록의 정확성이나 부정 방지를 위해 지문 날인이 필수적이라는 견해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외교적으로 외국인 지문 날인 제도의 재검토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1984년 재일 한인의 법적 지위 향상에 노력한다고 하는 공동 성명을 받아들여 일본 법무성에서 이 제도의 재검토에 착수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1985년 법무성은 외국인 지문 날인 제도를 완화하여 운용하겠다고 하면서 지문 날인을 계속 거부하는 외국인은 고발 조치하겠다는 지시를 각 지자체에 하였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등은 이에 반발하여 지문 날인 보류 투쟁을 전개했다. 이에 맞추어 가와사키시와 같은 지자체에서는 날인 거부자를 고발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표명하기도 했다. 1985년 한일 정기 각료 회의에서 일본 측이 문제를 장래에 자주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자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지문 날인 유보 전술을 철회했다. 각지의 지문 날인 거부에 관한 형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이 나왔지만 국회가 입법을 통해 지문 날인 제도를 보완할 것을 요구하는 판결이 이어졌다. 그것은 해방 이전부터 일본에 거주하고 조세를 부담해 왔으며 일본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있는 재일 한인과 그 자손 등, 이른바 정주 외국인의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본 사회에서 강렬하게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일본 정부는 1991년 1월 한국과의 정상 회담에서 지문 날인 제도를 폐지하겠다는 의향을 전달했다. 1992년 6월에는 외국인등록법이 개정되었고 1993년 1월부터 시행되었는데, 영주자 및 특별 영주자에 대해서는 지문 날인이 면제되었다. 대신 동일성 확인 수단으로서 사진이나 서명 이외에 부모, 배우자 성명 등 가족 관계를 새롭게 등록하게 되었다. 비즈니스맨이나 기술자 등 영주 자격이 없는 1년 이상 장기 체류자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지문 날인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999년 등록법 개정을 통해 비영주자의 지문 날인도 폐지되기에 이르렀고 2000년 4월부터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2001년 9월 미국에서 테러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정부는 2006년에 테러 방지 대책의 일환으로 출입국관리법을 개정하여 일본에 입국하는 외국인에게 지문과 얼굴 사진을 제공하도록 의무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