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재일 한인 집거지 우토로 마을과 지키기 운동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일본 교토부 우지시 이세다정 51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GPS 좌표 https://www.google.co.kr/maps/place/Utoro-51+Isedach%C5%8D,+Uji-shi,+Ky%C5%8Dto-fu+611-0043+%EC%9D%BC%EB%B3%B8/@34.8809097,135.7684048,16z/data=!4m5!3m4!1s0x6001105f98596601:0x9c57832d3f426024!8m2!3d34.8809053!4d135.7727822
정의

일제 강점기 말 일본 교토부에 형성된 재일 한인 집거지 우토로 마을 지키기 운동 이야기.

우토로 마을 형성과 전범 기업

우토로 마을은 일본 교토부[京都府] 우지시[宇治市] 이세다정[伊勢田町] 우토로[ウトロ] 51번지에 있는 재일 한인 집거지이다. 1940년 경 태평양 전쟁 중에 비행장 건설을 위해 동원된 조선인들의 집단 거주지로 형성된 마을이다. 일본이 패전한 1945년 우토로 한인들이 해방의 기쁨을 느낀 것도 잠시, 1945년 9월 일본에 상륙한 미군은 일본군 시설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교토 비행장과 항공기 조립 공장 등의 소유주였던 일본국제항공공업[日本国際航空工業]도 마찬가지였다. 일본국제항공공업 사장 쓰다[津田]는 전쟁 협력 혐의로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을 견제하던 미국은 일본 점령 정책을 바꾸었고, 쓰다는 1946년 석방되었다. 그리고 일본국제항공공업도 일국공업[日国工業]으로 이름을 바꾸고 부활을 시도하였다. 또한 회사를 신일국공업과 일국공업으로 분리해 명목상의 회사인 일국공업에게는 전쟁 책임을 지게 하고 신일국공업[이후 닛산차체]은 트럭, 버스 등을 생산하는 회사로 새롭게 태어났다. 당시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만 있었다면, 그리고 일국공업이 강제로 끌려온 우토로 주민들에 대한 보상의 의지가 최소한이나마 있었다면 우토로 주민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불하했어야 하였다. 하지만 일국공업과 신일국공업 모두 이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그 사이 한반도에서는 한국 전쟁이 발발한다. 한반도에, 재일 한인들에게 한국 전쟁은 끔찍한 비극이었지만, 신일국공업에게는 부흥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재일 한인들의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항공기 조립 공장은 미군용 자동차와 탄환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새롭게 태어났고, 신일국공업은 한국 전쟁 특수로 큰돈을 벌었다.

우토로 마을 매각과 재판 투쟁

한국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접수했던 비행장 터는 일본 정부가 사들여 육상자위대 주둔지가 되었다. 비행장의 사택들도 일본 정부가 사들여 일본인들에게 팔았다. 그러나 우토로는 일본 정부의 매입 불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다만 1961년 일국공업은 우토로 주민들에게 토지 일괄 매수를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일국공업은 토지 대금으로 수억 엔을 요구했고 주민들은 거절하였다. 가난과 차별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낼 수 없을 정도의 거액이었고, 무엇보다 주민들은 전후 보상 차원에서 “토지를 무상 불하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교섭은 결렬되었고, 우토로 토지는 닛산차체[닛산자동차]로 넘어갔다. 그리고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는 더 이상 일본 정부가 재일 한인들의 전후 보상 요구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닛산차체 측은 우토로를 철저하게 방치하였다. 일본 정부는 땅의 소유주인 닛산차체가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토로에 상하수도는 물론 소화전이나 도로도 설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땅의 소유권을 얻어야겠다고 판단한 우토로 주민들은 1970년 닛산차체에 토지 매각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닛산차체는 주민들의 요구를 묵살하였다. 사실 닛산차체는 우토로 지역에 공장을 세울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1983년 주민들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닛산차체는 우토로 토지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우지시에 중개 요청을 했고, 우지시청의 담당자로부터 우토로 자치회장이라고 자처하던 히라야마 마스오[平山桀夫][본명 허창구]를 만나 토지 매각 협상을 시작했다. 허창구는 1987년 3월 9일 닛산차체와 토지 매매 계약을 체결했다. 매매 가격은 3억 엔이었다. 1998년 교토 지방재판소의 판결문에는 허창구를 자치회장이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허창구는 마을을 대표해서 어떤 의사 결정권이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허창구의 매각 배후에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교토 지방본부장이었던 하병욱[판결문에는 가와무라로 표기]이 있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닛산차체로부터 매입 제의를 받은 허창구는 자금 문제로 고민을 하게 되고, 하병욱에게 자문을 구한다. 이에 하병욱은 오사카쇼긴[大阪商銀]으로부터 매입 자금을 빌리기 위해 서일본식산(西日本殖産)이라는 부동산 회사를 설립하고 자신이 보증을 서 허창구에게 토지 매입 자금을 빌려 준다. 허창구는 결국 하병욱의 도움으로 닛산차체로부터 3억 엔에 우토로 토지를 매입하였다. 그런데 허창구는 “닛산차체에서 4억엔에 우토로 토지를 매입했다.”라며 하병욱에게 거짓말을 한 채, 토지 매입 2개월 뒤인 1987년 5월 하병욱[서일본식산]에게 4억 4500만엔에 우토로 토지를 재매각하였다. 허창구가 이 과정에서 1억4500만엔을 벌어들인 것이다. 마을이 발칵 뒤집어진 것은 1988년 3월. 부동산업자들이 매매 물건을 본다며 우토로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우토로 토지가 허창구를 거쳐 하병욱의 서일본식산에 매각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주민들은 격분했다. 모든 일을 주도했던 허창구는 매입 사실이 들통 나자 가족들과 함께 야반도주하였다.

일본 시민 단체의 마을 지키기 활동

이후 우토로 문제는 일본 정부의 경우는 한일기본조약을 이유로 일체의 배상 의무를 부인하고 있으며, 한국 정부도 외교적 이유를 들어 우토로에 대한 직접적인 해결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이러한 양국 정부의 관심 밖에서 우토로 마을 지키기 운동은 일본과 한국의 시민 사회의 지원과 협력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일본과 한국의 시민사회의 활동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일본의 경우, 1989년 3월 우토로 마을이 서일본식산으로부터 토지 소송을 당하여 재판이 시작되자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이 결성된다.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은 크게 다음의 4가지의 활동으로 우토로 마을 지키기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첫 번째로는 일본인들도 함께하고 있다는 주민들의 심리적 후원군 역할이다.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은 2002년 7월부터 ‘고령자들의 생활사 청취 조사’를 시작함으로써 우토로 주민들의 애환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에 들어갔다. 두 번째로는 다양하고 활발한 대내외 홍보 활동이다. 일본과 한국은 물론 미국과 유럽 등 세계 주요 지역 시민들에게까지 우토로 마을의 문제를 홍보하며 국제적인 여론을 조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990년 4월에는 ‘일독평화포럼’ 교류단에 합류하여 독일을 방문하고 일본 기업들의 전후 처리 노력에 대한 비교 내용을 인터뷰하기도 하였다. 세 번째로는 사법적·물리적 투쟁 역량을 지원하고 있다. 1989년 3월부터 2000년 11월 교토 최고재판소의 패소 판결이 내릴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계속되는 철거 위협 등에 대응하면서 주민과 함께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1998년 12월의 ‘우토로를 지키는 인간띠잇기’ 행사에 이어 2004년 8월 ‘우토로를 지키는 긴급행동’으로 500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강제 해체의 움직임을 견제하는 집회를 여는 등의 활동으로 강제 집행은 유보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제도 개입적 해결책의 모색’이 있다. 주민회와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 측은 1심 판결 패소 이후 국제 여론에 호소하는 대외적 방법과 행정 조치를 촉구하는 대내적 방법의 양면 전략을 병행하기로 결정하였다. 2001년 8월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은 제네바에 대표를 보내어 일본의 사법부나 행정부가 보이는 태도의 부당함을 호소하였다. 2005년 7월 우토로 마을을 현지 조사한 유엔 인권위원회 인종 차별 특별 보고관이 작성하여 2006년 3월의 제 62차 유엔인권위원회 총회에 정식 보고한 보고서는 일본 정부에 “우토로 주민이 거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인식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라고 권고하였지만 일본 정부는 이것을 묵살하고 있다.

한국 시민 단체의 마을 지키기 활동

다음으로 한국 시민 사회의 지원 활동을 살펴보면 먼저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의 한국 방문이 이루어진 것은 1994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우토로 재일 동포의 거주권을 지키는 서명 운동’이 시작된 것은 1996년 7월부터였다. 한국인권단체협의회가 일본에 파견한 우토로조사단이 우지시청과 교토부에 우토로 문제 해결을 위해 협조해 달라는 요청서를 전달하고 ‘한국에서 본 우토로 문제’를 강연한 것이 1997년 5월이었다. 그리고 1997년 9월 우토로 주민회와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 측의 두 번째 한국 방문이 이루어졌다. 2002년 4월에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교토지부가 우토로 공동 실지 조사를 우지시에 요청하였다. 2004년 9월 15일에는 춘천에서 ‘한중일거주문제국제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에 우토로 주민들과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 회원들이 참가하여 언론 취재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한국 시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2005년이 되면서 우토로를 향한 한국 사회의 관심이 크게 높아지게 된다. 2005년 4월 23일 ‘우토로 문제를 생각하는 국회의원 모임’이 우토로 현지를 방문하였고 4월 27일 한국에서 ‘역사청산, 거주권보장, 우토로국제대책회의’가 결성식을 가지면서 우토로 문제는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기에 이르렀다. 한국 시민 사회를 중심으로 우토로 주민들과의 교류나 격려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중에서도 대내외 홍보 활동이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한국 시민 사회 활동 중에서도 무엇보다 특징적이었던 활동은 모금 활동이었다. 2005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우토로국제대책회의’[공동 대표 박연철 변호사, 김경남 목사, 전종훈 신부, 진관 스님, KNCC인권위원회 참여 단체]는 우토로 주민회와 일본의 시민 단체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과 연대하여, 우토로의 역사와 거주권을 지켜 나가는 구체적인 활동의 일환으로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2005년 5월부터 시작한 국내 모금 캠페인은 1년 남짓한 기간에 5억 원 이상을 모았다. 한국 시민 사회의 우토로 지원 활동은 다양하고 역동적인 아이디어로 진행되었다. 모금 활동의 경우에도 ‘우토로를 살리는 33인 시민모금단’을 만들어 우토로 문제의 역사적 배경이나 심각성을 알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와 아울러 직접적인 홍보 활동을 통해서 여론의 관심을 이끌어 냈다.

예를 들면 일찍이 1997년에 MBC의 「PD수첩」이 우토로 문제를 다루었으며, 2005년 이후에는 YTN방송도 관련기사를 꾸준히 내보냈다. 광복 60주년이었던 2005년에는 주간지 『한겨레21』이 일 년 내내 우토로 관련 기획 기사를 내보냈다. 2006년에는 광복 61주년 맞이 ‘우토로를 살리기 희망 콘서트’가 개최되었다. 2008년에는 우토로 마을의 역사와 주민들의 일상을 10년에 걸쳐 촬영한 다큐 영화 「아름다운 게토」[감독 김재범]가 공동체 상영되었다. 2015년에는 MBC의 「무한도전」 프로그램을 통해서 다시금 우토로의 현재가 그려지면서 국민적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한일 시민 사회가 중심이 된 지원활동과 양국의 뜻있는 사람들의 관심과 성원에 힘입어 ‘우토로 주민회’는 2005년 7월, 토지의 일괄 매입 방침을 결정하고, 1세들의 거주권을 보장하는 집합 주택 등을 포함한 마을 조성 계획을 진행했다. 주민회 엄명부 부회장은 “토지를 주민이 소유하지 않는 한 우토로에 미래는 없다. 이제 우토로 땅을 사기 위한 교섭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에는 일본 정부에 의해 강제 퇴거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일본인과 한국 시민 단체 등의 모금과 한국 정부의 지원금으로 2010년 우토로 마을의 6,000평[19,834.71㎡] 중 2,000평 가량의 토지를 매입했다.

이후 주민 재입주 보장을 전제로 한 일본 정부의 재개발이 추진되었다. 일본 정부는 2016년 6월부터 우토로 마을에 대한 철거 작업을 시작하였고 4~5년간의 ‘마을 만들기 사업’을 통해 2동의 공적주택과 공원 등을 조성할 예정이다. 우토로 주민들과 뜻있는 시민들은 우토로와 재일 한인 역사를 담은 작은 기념관을 건설하기를 소망하고 있다. 현재 우토로에 사는 재일 한인들은 약 65세대 150여 명이며, 일본 국적 취득을 거부하고 있다.

평가와 현재

우토로 마을 지키기 운동은 일제 강점기 말 형성된 교토의 재일 한인 집거지 우토로 마을에 대한 일본 기업 닛산차체의 부당한 토지 소유권 행사에 저항한 운동으로서, 우토로 마을 주민의 생존권 위기 상황에 대해 한국과 일본의 시민 사회는 주민들의 투쟁을 지원하며 당면한 토지 매입 자금을 모금하는 등 일련의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참고문헌
  • 진은경, 「일본의 우토로 재일 조선인 거주권 확보 운동에 관한 연구」(이화여자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11)
  • 유영국, 「우토로 문제를 통해 본 한·일 시민 사회 연대의 성과와 과제」(『한국민족문화』34,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09)
  • 『연합뉴스』(1996. 2. 12, 2007. 4. 16)
  • 『오마이뉴스』(2006. 10. 18)
  • 「우토로의 눈물… 사라지는 75년 역사」(『미디어오늘』, 2016. 6. 22)
  • 『국제신문』(2017.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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