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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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1965년 한일협정 이후 1960년대 대한민국 경제 개발에 기여한 재일 한인들의 이야기.
재일 한인 기업의 한국 투자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때까지 주로 섬유 산업과 경공업에 집중되었고, 1965년 이후로는 전기 전자 산업과 호텔 및 골프 산업, 금융업에 집중되어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한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개인 재산 반입과 기부, 구로공단을 통한 모국 투자는 지역 사회와 한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더 나아가 한국 문화 사업, 생활 환경 개선, 녹화 사업 등에도 적극 공헌하였다.
재일 한인 기업과 모국 기업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1년 5월 군사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같은 해 재일 한인 기업가 50여 명을 초청하여 한국 투자와 지원을 요청하였다. 초청 재일 한인 기업가들에게 경제 지원 요청이 가능했던 이유는 일부 재일 한인 1세들이 군사 쿠데타를 군사 혁명으로 지지했고, 지지 세력 기반이 된 동향의 경상도 출신이 많았다는 점도 작용했다. 1964년 당시 경상도 출신 재일 한인은 63.5%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다음이 전라도, 충청도 순이었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 한인 1세 기업가 2명 중 1명이 경상도 출신이었다. 출신 지방별로 보면 경상도에 이어 제주도가 2위를 차지하였다.
제주도는 20세기에 들어와 일본 식민지 지배 경험, 4·3 민주 항쟁, 한국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역사적으로 아픈 상처를 딛고 형성된 생활 형태가 육지와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재일 제주도인 연구 결과에 의하면 제주도 경제 발전에 기여한 재일 제주도인의 지연 네트워크로서 마을친목회가 대표적인 조직이었다. 해방 전후 일본에서 제주 출신 마을의 지역별 친목회가 결성되었다. 친목회의 성격도 다양하여 해방 이전에는 새로운 환경 적응을 위한 상호 부조의 목적이 강하였지만, 해방 이후 특히 1960년대에는 출신 지역, 제주도, 한국 등으로 시대의 요청에 따라 광범위한 초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각 친목회는 규약을 정하고 연중행사와 출신 지역에 대한 지원, 일본에서의 상호 부조의 정신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재일 한인 네트워크 구축을 통한 마을 친목회의 역할이 지연 결합의 기능에 따른 제주도인 정체성의 유지나 강화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재일 제주도인의 네트워크 구축과 유지는 출신 마을의 지역 발전을 위한 기부와 상호 교류를 시행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제주도의 출신 기업가들은 특히 제주 지역 교육 사업에 많은 기부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일 한인 기업가 중에는 고향에 학교를 설립하고 장학회를 설립하여 육영 사업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육영 사업과 더불어 새마을 운동에 적극 협력하는 등 고향의 생활 개선을 위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재일 한인들의 교육 투자는 기업 투자와는 달리 장기적인 교육 인프라 정비로 인재 육성을 목표로 투자하기 때문에 그 인재들이 모국의 근대화 및 경제 발전의 주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62년 박정희 정권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통화 개혁을 단행하였다. 1963년에는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하고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수정과 수출 지향의 경제 정책을 본격적으로 가동하였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의한 ‘한국과 일본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 한국인 법적 지위 협정 체결’은 재일 한인 1세 기업가의 모국 투자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1966년 8월 박정희는 외자도입법[법률 제1802호]을 공포하였다. 외자도입법은 재일 한인 1세들에게 “한국 투자를 외국인 투자로 우대하는 것을 보장한다.”라는 내용으로 ‘외자도입시행규칙’을 정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에 의해 재일 한인 기업가의 한국 투자의 길이 본격적으로 열렸다.
재일 한인의 모국 재산 반입 실태를 살펴보면 주로 나일론이나 기계 부속품, 화공 약품 등이 많았으며 특히 섬유류의 한국 투자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재일 한인의 개인적인 재산 반입 경우에도 경공업 분야인 섬유류가 당시의 주요 투자 산업이었다. 또한 섬유 산업에 필요한 화공 약품이나 기계류가 투자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재일 한인 기업의 1965년부터 1987년까지 성향을 살펴보면 1964년 이전과는 달리 전기 전자 산업이나 관광 호텔업에 대한 투자가 집중되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1967년 베트남 파병과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으로 한국의 경제도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이 재일 한인 기업의 기술에 의존한 노동 집약적인 섬유 산업에 집중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재일 한인 기업가의 기술, 미국의 베트남 파병 대가, 그리고 한국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미국 시장에 섬유 제품을 가공 수출하는 수출 주도형 분업 체제를 확대시켜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다.
재일 한인 기업의 모국 투자와 관련하여 재일한인본국투자협회가 1995년에 발표한 모국 투자 업종 및 지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재일한인본국투자협회는 “재일 한인의 모국 투자 유치와 한국 진출 기업의 발전 및 상호 연대 강화에 의한 모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라는 취지에 의해 1977년에 설립되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 정부는 경제 발전에 필요한 기술과 자본을 선진국으로부터 도입하려 했지만 열악한 경제 수준과 혼란한 정국으로 인하여 한국 진출을 기피했기 때문에 재일 한인 기업가들이 솔선수범하여 정부 정책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 결과 많은 재일 한인 기업들이 한국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민간 자본에 의해 신한그룹과 제일투자금융, 제일스포츠센터, 가야개발 등 종합 운동 오락 시설, 그리고 한국전자, 롯데그룹, 신한일전기, 방림방적 등 다수의 기업들이 모국에 진출하여 한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밖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재일 한인들의 개인적인 재산 반입과 기부 등을 통해 한국의 경제와 지역 사회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1995년 기준으로 한국에 투자한 재일 한인 기업을 살펴보면 재일한인본국투자협회 회원 기업이 155개사, 비회원사가 46개사로 총 201개사의 재일 한인 기업이 모국에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투자 기업의 업종별 분포를 보면 전기 전자, 호텔 숙박, 화공, 골프, 기타 서비스[식당] 등이다. 지역별 분포는 서울, 경상도, 경기, 부산 지역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재일 한인들의 모국 투자와 한국 경제 발전에 대한 공로는 한국 역대 대통령들의 훈장 수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의 재일 한인 기업가 훈장 수여자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는 박정희 정권 아래 많은 재일 한인 기업가들이 투자하게 된 배경에 대해 당시 투자가에 대한 한국 정부의 훈장 제도와 애국심의 고양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재임 기간인 1963년 12월부터 1980년 10월까지의 국민 훈장은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 분야에 공적을 세워 국민의 복지 향상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것으로서 재일 한인 57명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재임 기간인 1980년 9월부터 1988년 2월까지 동백장 수여자가 76명이었고 노태우 정권의 재임 기간인 1988년 2월부터 1993년 2월까지 동백장 수여자가 38명이었다. 특히 이때는 서울 올림픽 개최와 관련된 재일 한인 체육 훈장 수여자 67명 모두는 전두환 정권 때 1988년 서울 올림픽 후원 공로로 1987년 11월에 수여한 것들이었다. 목련장의 경우 박정희 정권이 5명, 전두환 정권이 15명, 대전 엑스포 후원 공로로 노태우 정권 때 15명, 기타 5명 등이었다.
재일 한인의 한국 투자는 기업가들의 이익을 앞세운 합리적인 선택보다는 이러한 훈장 제도와 모국과의 친인척 관계 등 비합리적인 감정에 의존했기 때문에 나중에 경영 실패로 인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했다. 재일 한인 기업의 한국 투자는 구체적으로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소속의 재일 한인의 경우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때까지 주로 섬유 산업과 경공업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1965년 이후로는 전기 전자 산업과 호텔 및 골프 산업, 금융업에 집중 투자하였으며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한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재일 한인 개인의 재산 반입과 기부, 재일 한인 기업의 구로공단을 통한 모국 투자는 지역 사회 발전과 한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1945년 해방 이후 현재까지 재일 한인 기업가의 한국 경제 발전에 공헌한 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경제 발전 초기에 박정희 정권에 경제 발전을 위한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 코오롱그룹의 창업자 이원만은 일본 기업 경영에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수출 산업을 육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원만은 공업화에 성공한 일본 사례를 들어 한국의 모든 산천이 자원이며 사용 가능한 자원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원만은 여성의 머리카락을 활용하여 가발을 만들어 수출하면 큰돈을 벌 수 있고 기술이나 설비도 필요 없다고 제안하였다. 이 아이디어를 박정희 정부가 수용하여 당시 가발 산업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또한 이원만은 재일 한인 기업가의 자본과 노하우를 도입하여 국내 수출 전용 공업 단지를 조성해야 한다고 제안하여 1965년 구로공단의 설립이 현실화되었다. 둘째, 재일 한인 기업가들은 한국 경제개발을 위한 자본과 노하우를 제공하였다. 일본에서 성공한 재일 한인 기업가들은 재산 유입의 목적으로 일본에서 설비와 원자재 등을 도입하여 한국 경제의 산업화를 도왔다. 또한 한국 최초 수출 전용 공업 단지인 구로공단에 입주하여 수출을 통한 외화 소득에 크게 공헌하였다. 재일 한인 기업가들은 일본에서 최신식 기계와 설비들을 도입하였으며 무료 기술 이전과 경영 노하우를 전수하여 한국 경제 발전 초기의 산업 기반 조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셋째, 재일 한인 기업가들은 모국 발전에 기여한다는 심정으로 한국 산업에 직접 투자하여 산업화의 기수로 활약하였으며 한국 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였다. 넷째, 재일 한인 기업가들은 금융 재정 면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재일 한인 기업가들은 모국 내 기업 활동에서 법률의 미정비, 한일 습관의 차이, 인식의 차이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한국에서 은행 융자 시 한국인들보다 엄격한 조건이 적용되어 융자의 어려움을 겪자 독자적인 은행 설립에 나섰다. 그리고 재일 한인이 100% 투자한 신한은행을 설립하여 한국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다. 다섯째, 재일한인상공회부인회 등의 모국 지원 활동은 새마을 운동 지원, 서울 올림픽 지원, IMF 통화 위기 지원, 태풍이나 홍수 등 자연재해 시 지원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일본에는 출신 지역별 향우회가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제주 개발협회, 경남 개발협회, 전남 개발협회 등이 출신 고향 개발 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다. 여섯째, 재일 한인 기업가들은 한국 교육 및 문화 사업에도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들은 모국의 민족 교육을 위해 기부하였고 고향에 장학 사업, 학교 설립 등으로 인재 양성에 앞장섰다.
이상과 같이 재일 한인 기업가들은 한국 사회와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또한 한국 경제 발전에서 더 나아가 한국 문화 사업, 생활 환경 개선, 녹화 사업 등에도 적극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