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한인의 애환과 삶이 뿌리내린 파친코 산업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정의

해방 후 재일 한인들이 취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시작하여 현재 재일 한인을 대표하게 된 산업의 성장 이야기.

개설

해방 후 재일 한인들은 국적 차별과 취업 차별로 공공 기관이나 민간 기업에 취업할 수 없었다. 재일 한인들이 취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삶을 개척하기 시작한 사업인 파친코 산업은 현재 재일 한인을 대표하는 산업이 되었다. 생계를 유지가 어려웠던 재일 한인들이 나고야에서 파친코 기기 제조의 하청업과 경품 교환에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면서부터 파친코 산업은 시작되었다. 파친코 기기 제조 하청업과 경품 교환 관련 일을 하던 재일 한인의 일부가 파친코를 운영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점포 경영에 뛰어들었다.

생계 유지를 위해 가나자와에서 처음 시작

일본에서 재일 한인의 파친코[유기업] 산업은 1927년경 시작되었다. 1942년경에는 일본 정부의 기업정비령에 따라 불필요한 산업으로 폐지되었지만, 해방 전후 1945년 8월 가나자와시[金沢市]에서 재개되었다. 해방 전후 정치적·사회적으로 혼란기 별다른 오락이 없었던 시대에 배급품이었던 담배를 경품으로 받을 수 있었던 점과 새로운 파친코 기계 마사무라게지의 제작으로 인해 인기가 많았다. 1949년 당시 파친코 점포는 약 4,800개였는데 1952년에는 42,000개로 증가하였다. 당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떠한 일도 불사했던 재일 한인들은 나고야에서 파친코 기기 제조 하청업과 경품 교환에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파친코 기기 제조 하청업과 경품 교환 관련 업무를 하던 재일 한인 중 일부가 “파친코를 직접 운영하면 돈을 벌 수 있다.”라는 소문을 듣고 점포 경영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또한 당시 고철업과 폐품 수집업에 종사하던 재일한인들이 파친코 경영으로 전업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파친코와 기타 유기업은 “반사회적 직업과 연장선에 있다.”라는 사회적 통념 때문에 일본 중소기업이나 대기업, 국가 및 지방 공무원 등의 임용에 취업 차별을 받고 있던 재일 한인들이 위험 부담은 높지만 유일하게 참여할 수 있었던 업종 가운데 하나가 파친코 산업이었다. 재일 한인의 파친코 산업 종사자는 1952년 4.6%, 1954년 7%였으며, 1956년 통계에서는 서비스업 관련 부문에서 단연 으뜸이었다. 일본 전국의 파친코 점포 수는 1995년 12월 조사에 의하면 18,244개 정도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한 개 업자가 복수의 법인, 또는 개인 명의로 경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로 파친코 총수는 6,000~8,000개 정도로 추정되었다. 또한 파친코 홀의 경영자뿐만이 아니라 파친코 대 메이커나 보급기 메이커와 같은 파친코 관련 산업 종사자들이 일본 국적으로 귀화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면 파친코 관련 재일 한인 종사자는 훨씬 많은 것으로 예상된다.

국적 차별과 취업 차별로 파친코 산업으로 진출

재일 한인이 파친코 산업에 집중되는 이유는 일본에서 국적 차별에 의한 취업 차별로 재일 한인이 공공 기관이나 민간 기업에 취업할 수 없었던 시대가 장기화되었고, 파친코 산업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낮아 일본 기업들이 투자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파친코 산업은 당시 3D 업종이나 틈새 산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던 재일 한인들에게 진입 조건을 충족하는 산업 가운데 하나였다. 재일 한인들이 파친코 산업의 활로를 개척한 결과, 시장 점유율이 70%을 넘어서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파친코 산업은 고용 효과도 매우 컸다. 파친코 산업의 취업자 수는 주변 산업을 포함하여 약 4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많은 재일 한인들이 파친코 사원으로 일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부양가족까지 합치면 매우 많은 사람들이 파친코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또한 파친코업계 재일 한인은 민족성 유지에 드는 비용 부담, 납세 등으로 일본 사회에도 많이 기여했다.

파친코 산업은 재일 한인 기업 중에 가장 중요한 산업 중의 하나가 되었다. 파친코 홀뿐만 아니라 파친코 대를 만드는 파친코 제조메이커 또한 거대 산업을 형성하였다. 파친코 기기 메이커 약 7할 이상이 재일 한인 기업가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파친코 기기 메이커 중 최고 순위는 주식 회사 평화의 나카지마 겐키치 회장이다. 일본에 있는 파친코 기계의 두 대 중 한 대가 평화에서 제작한 것이라 할 정도이다. 나카지마 겐키치의 기업 경영 성공 비결과 철학은 “노사 간의 신뢰, 고객 중심, 연구 개발 중시” 등이다. 비즈니스 철학은 “사람을 중시하는 동양적인 배려”로서 기업 과정에서 자연히 형성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재일 한인이 집중하고 있는 3대 업종은 파친코 등의 유기업, 고리 대금업을 포함한 금융, 부동산 그리고 야키니쿠[燒肉] 음식업이라고 한다. 파친코 산업은 한때 자동차 산업을 제치고 매출액 30조 엔을 달성하였으며 전체 중 약 70%를 재일 한인이 지배한 적도 있었다. 가정상 약 20조 엔 이상이 재일 한인의 손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던 셈이다. 매출액 30조 엔이라고 하면 1990년도 한국 GNP에 필적하는 금액이다. 매출액 1,000억 이상이 넘는 대형 파친코업계의 마루한, 다카야마 물산, 마쓰하라 흥산, 제일물산, 도쿄 오타 등 모두 재일 한인이 경영하고 있는 업체이다. 파친코 산업이 지금은 엔터테인먼트나 오락 산업의 하나로서 최첨단산업으로 부상하였지만, 원래 갬블[도박성]이나, 경품 교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트러블, 야쿠자 관련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업종이었다. 또한 풍속영업 등 규제법의 대상으로 일반 비즈니스계로부터도 소외되었다. 재일 한인들은 이러한 파친코 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여 뿌리를 내리고 성장시키는 데 노력을 경주해 온 결과 버블 경기 붕괴 이후에도 장기간의 불황을 극복하고 여성 고객을 유치하는 데 성공하여 대중오락으로서 자리 잡았다.

최근 고학력 재일 한인으로 세대 교체

최근에는 파친코 산업은 세대 교체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파친코 산업을 창업한 재일 한인 1세를 대신하여 고학력의 재일 2세와 3세들이 파친코 산업 경영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재일 2세와 3세들은 시대 흐름을 빨리 파악하여 파친코를 패션화하고 지금까지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젊은 세대들이 당당히 ‘파친코 데이트’를 즐기는 풍경도 목격되었다. 최근 재일 한인이 경영하는 파친코 산업은 불경기와 과잉 경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또한 경찰의 규제, 인기업종의 생산 중지 등에 따른 고객 감소 등이 경영 압박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파친코 점포의 도산이 증가했는데, 그 이유는 불경기 보다 버블기의 부동산 과잉 투자, 무모한 점포 개점 등이 주된 원인으로 분석되었다. 왜냐하면 재일 한인 파친코 경영자들은 일본인과 똑같이 의존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불경기는 물론이고 다양한 핸디캡을 극복하면서 비즈니스를 일구고 몇 번이고 실패했다 다시 재기한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일본 당국은 1984년 4월 ‘풍속영업 등 단속법의 일부를 개정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러한 풍속영업법은 해방 전과 연관되어 1948년에 제정된 이후 13차례나 개정되어 종래에는 8조밖에 없었던 조문이 전체 51조로 증가하여 사실상 신법 제정과 같은 것이었다. 개정법의 목적은 종래 “선량한 풍속의 유지”라고 하지만, 해마다 “건전한 풍속 환경의 유지”, “청소년의 건전한 육성” 등으로 그 의미를 불명확하게 제시하여 해석에 따라 경찰이나 행정 당국이 자유재량으로 자의적인 운용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러한 풍속영업법은 문제점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 영업 허가, 허가 기준, 현장 검사 등 기업 경영의 기본이 되는 문제가 애매한 점, 둘째, 일본 헌법의 영장주의 무시, 셋째, 영업소에 관리자를 두도록 되어 있지만 공안위원회가 부적당하다고 인정한 경우 해임의 명령도 가능하다는 점, 넷째, 벌칙 규정의 강화, 행정 경찰권에 따른 지도 등 죄형법정주의를 일탈하는 구성, 다섯째, 재일 한인 경영자가 업계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유기업을 성풍속 산업과 혼동시켜 기업 활동의 자유 및 영업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이유를 들어 재일 한인들이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풍속영업법안의 정식 명칭은 “풍속영업 등의 규제 및 업무의 적성화 등에 관한 법률”로서 보통 신풍속영업법으로 부르고 있다. 규제 대상에는 ‘게임센터’, ‘레스토랑’, ‘모텔’ 등이 포함되었다. 이것은 영업 허가, 취소, 정지 등에 대한 행정 경찰권을 확대 강화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경찰관이 업무에 관한 보고 및 자료 제출을 요구할 수 있는 강제 수사권을 확대하여 질문, 검사권까지도 법으로 정하였다. 개정안은 또한 벌칙 규정의 강화, 영업소 관리자 문제, 파친코 기기의 규제 및 인정에 이르기까지 공안위원회의 지정 아래 통일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즉, 개정안의 본질은 경찰 권력이 풍속영업 전반에 무제한으로 개입하여 업계 전반을 통제 장악하고 권한을 행사하는 데 있었다

재일 한인을 대표하는 산업으로 성장

파친코 산업은 재일 한인 산업 구조의 비제조업화, 서비스화를 주도한 대표적인 산업으로 평가된다. 파친코 산업은 1990년대 시장의 거대성이 각광을 받은 성장 산업이었으며 재일 한인의 최대 산업이기도 했다. 파친코 산업은 크게 다음과 같이 분업화 과정을 거쳤다. 먼저 소비자에 가까운 하류 단계에는 서비스업의 파친코 홀이 있다. 그 위의 상류 단계에는 홀에 설치되는 파친코 대를 제조하는 기계 메이커와 부품 메이커, 파친코 대를 움직이는 주변 기기와 홀 내의 설비를 제조하는 메이커 등이다. 중류 단계에는 기계유통을 담당하는 기계 도매상, 경품 유통을 담당하는 경품 도매상이 있다. 시장 규모가 35조 엔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된 1996년의 각 분야 시장 규모를 보면 파친코 기계 시장은 5,250억 엔, 주변 기기 및 설비 시장 관련은 5,000억 엔 정도, 일반 경품 도매상은 1조 4207억 엔 정도였다. 특수 경품 도매상을 통해 손님에게 환원되는 것이 35조엔 가운데 약 29조 엔이며, 그 차액 6~7조 엔 정도가 홀의 수익으로 추정되고 있다.

재일 한인이 조사한 1997년의 기업 명감은 재일 한인 모두를 커버하는 것은 아니지만 파친코 홀이 1,548개사로 기재되어 있다. 기계 메이커는 7개사이며 1995년 기계 메이커 19개사 가운데 재일 한인이 35%를 차지하였다. 또한 파친코 기기 판매 회사가 35개사, 경품 도매가 24개사로 기재되어 있으며 사업 내용에는 파친코 부품과 주변 기기 제조라고 쓰여 있는 기업이 3개사이다.

파친코 산업은 산업 내의 어느 분야에도 재일 한인이 참가하고 있다는 것이 다른 재일 한인 산업과는 구별되는 특징이다. 재일 한인은 주요 산업의 제조업에서 산업 내의 특정 공정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재일 한인이 해방 전부터 취업 경험을 가진 분야에서 특화되었기 때문이다. 재일 한인이 해방 전부터 파친코 산업에 취업 경험과 사업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해방 전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파친코 산업의 발전과 동시에 진행된 산업과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재일 한인과 파친코 산업의 깊은 관련성은 홀의 70% 정도를 재일 한인[귀화자 포함]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재일 한인 비율이 높은 이유에 대해서는 일본인들이 꺼려하였다는 점과 다른 취업 선택지가 없었던 차별의 산물이라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노동 시장에서 재일 한인의 차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차별에 의해 재일 한인에게 제한된 선택지만 부여되었다는 면에서 차별은 재일 한인이 파친코 산업에 종사하는 환경적 요인이며, 역으로 곧바로 파친코 산업을 선택하지는 않았다는 의미도 있다. 또한 파친코 산업이 일본인들이 싫어하는 산업이라는 점도 일종의 전제 조건이 되어, 파친코 산업과 재일 한인의 관계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재일 한인에게 있어서 파친코 산업은 해방 전후 그다지 중요한 산업은 아니었다. 1955년 시점에서 재일 한인 15세 이상의 취업자 146,381명의 산업별 구성에서는 건설업과 제조업이 각각 14%, 24%, 파친코 홀로 분류되는 서비스업은 10% 정도였다. 서비스업도 적지는 않았지만 재일 한인이 종사하는 주요 산업은 건설업과 제조업이었다. 더욱이 서비스업에는 당시 재일 한인이 가장 많이 종사하는 음식업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시기부터 파친코 홀의 70%를 재일 한인이 차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파친코 산업에서 재일 한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시대에 따라 변동되었을 것이다. 파친코 산업의 장기적인 추이를 살펴보면 재일 한인들이 규제에 의해 산업이 불황에 접어드는 1955년까지는 홀과 메이커 양쪽 모두에 참가하고 있었지만 1955년 이후에는 메이커로부터 퇴출이 계속되는 가운데 주로 파친코 홀에 참여하게 되었다.

1950년대 이후 파친코 산업의 동향과 시대적 변화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97년 존속 기업의 창업 연도와 1975년 존속 기업의 설립 연도를 살펴보면 전체 파친코 홀 수가 급증하는 1950년부터 1955년 사이에 참여 기업이 많아지고 있다. 일본 전국 파친코 홀 수는 1950년부터 1953년 사이에 약 5배로 증가하였으며 1953년부터 1957년 사이에는 5분의 1로 감소하여 참여 기업에 대한 존속은 1950년대 전반에 창업한 1997년도 잔존 기업이 매년 15개사 전후로 존재한다는 것은 적어도 약 5배 정도로 1980년대 이후 급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1997년 존속 기업의 창업 연도와 설립 연도를 살펴보면 1955년 규제 이후 잠시 기업 참여는 정체되었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면 1950년대 전반을 상회하여 증가하였다. 셋째, 1965년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한 파친코 사업 참여는 전국 파친코 홀 수가 증가하는 1970년대 전반에 다시 증가로 돌아섰다. 넷째, 1980년대 이후 전국 파친코 홀 수의 증가와 더불어 재일 한인의 사업 참여 수가 급증한 것은 1997년 존속 기업의 설립 연도에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파친코 산업 일본 전역으로 확산

재일 한인 파친코 산업은 일본 전국 파친코 홀이 증가한 1950년대 전반, 1960년대 전반, 1970년대 전반, 1980년대 전반에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파친코 홀은 마사무라 게지나 연발식[1950년대 전반], 튤립[1960년대 전반], 전동기[1970년대 전반]의 인기에 연동되어 증가하였으며 특히 히버기[1980년대 전반]의 출현에 의한 반응은 현저한 것으로 나타났다.

파친코 잔존 기업의 동향에 대하여 살펴보면, 일본 전국 파친코 홀 수가 1952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였지만 재일 한인 기업의 참가는 조금 늦게 정체되기 시작하였다. 1975년 잔존 기업의 설립 연도에서는 1955년까지 계속 증가하였으며 1997년 잔존 기업의 창업 연도 및 설립 연도는 1956년까지 거의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재일 한인 파친코 산업은 1958년부터 참여 경향이 강하여 1960년대 전반에 참여가 현저히 증가했다. 1950년대 후반은 파친코 홀의 경영이 안정적인 수익 구조에 의해 비즈니스로서 확립된 시기이다.

재일 한인의 파친코 산업의 참여는 이와 같은 성장성에 주목한 것으로 생각된다.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중반 이후 재일 한인의 파친코 산업에의 참여 시기는 일본 전국적으로 산업 성장기와 연동되어 발 빠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 성장 산업으로서 비즈니스 기회가 많았다는 것만으로 이러한 특징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재일 한인의 독자적인 요인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특징을 살펴보면 재일 한인 공동체의 산업 구조의 변화 등 재일 한인이 파친코 산업에 참여하는 계기와 사업 참가를 촉진시켜 실현 가능하게 한 공동체 내의 정보 축적으로부터 설명이 가능하다.

재일 한인 산업 구조의 변화와 파친코 산업의 관계를 살펴보면 파친코 산업의 성장과 함께 중요 산업이었던 제조업의 지위 저하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960년대, 1970년대 전반은 파친코 산업의 기계 시스템이 변하여 새로운 성장의 길이 열린 시기임과 동시에 재일 한인의 제조업 참여가 정체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주요 산업인 제조업의 참여 정체나 제조업으로부터의 전업과 동시에 파친코 산업 참여가 진행된 것이 파친코 산업 참여를 더욱 촉진시킨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재일 한인의 파친코 홀 사업과 관련된 사업 전개 유형에 대하여 살펴보면 네 가지 유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타 산업으로 퇴출하는 형태로 참여한 경우, 둘째, 이전 사업을 유지하면서 경영 다각화의 일환으로 참여한 경우, 셋째, 파친코 홀이 사업 전개의 토대가 된 경우, 넷째, 파친코 홀로부터 퇴출하여 타 산업으로 전업한 경우 등이다.

재일 한인이 파친코 산업과 연결된 최초의 계기가 된 것은 1950년대 전반에 파친코 산업에 관여하는 초기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초기 조건은 재일 한인이 파친코 산업을 비즈니스로서 선택 가능하게 한 사업 경험의 결과로서 자원-성공자, 사업 노하우, 파친코 홀 물적 자산 등-이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사행성으로 한때 파친코 산업 위기에 직면

사행성이 높은 기계를 금지한 1955년 규제가 파친코 산업 내에서 구조 전환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첫째, 1955년 규제 이후 그 이전에 비하여 사업의 예측 가능성이 높아지고 파친코 홀의 수익이 안정화되었다. 입지상의 조건과 바늘 조정의 기술적인 장애만 극복하면 안정적인 사업 전망이 열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1홀 당 설치 대수를 늘리면 매출액 증가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사회적 환경과 관련된 문제로 1955년 규제의 직접적인 요인이 된 것은 파친코 홀 사업과 폭력단[야쿠자]과의 관련이었다. 파친코 홀이 증가함에 따라 경품 문제, 환금 문제가 부상하여 그것이 폭력단의 자금원이 된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였다. 폭력단과 관련된 경품 문제가 경찰의 가장 큰 규제 목적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파친코 산업에 대한 사회적인 부정적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이 상황에서 출현한 1955년 규제는 파친코 산업을 ‘참여를 꺼리는’ 사업으로 낙인찍었다. 하지만 사업가에게는 비즈니스로서의 예측 가능성의 제고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규제에 의한 경영 조건의 갑작스런 변화라는 불확실성[리스크]을 증가시킴으로써 상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파친코 홀 사업과 폭력단의 관련은 1950년대 전반의 역사적인 산물이며 파친코 산업에 대해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재일 한인에게 있어서 주요 산업 대부분의 경우 해방 이전부터 취업 경험을 가진 제조업이나 건설업에 관련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파친코 산업은 일본 전국에서 일어난 제1차 붐을 계기로 당시 많은 일본인과 함께 참여한 재일 한인들이 존재했다. 1950년대 전반이라는 단기간에 재일 한인 내에 파친코 산업의 사업경험이 측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재일 한인들에게 있어서 파친코 산업과 관련된 초기조건의 하나였다.

1950년대 전반 파친코 붐의 종언은 규제 요인이었던 폭력단과의 관련에 의해 파친코 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정화된 부정적인 이미지는 1955년 이후 일본인의 퇴출을 촉발시키고 참여를 제한했다. 사회적인 부정적 평가는 그 후 재일 한인들이 파친코 산업에서 생존을 용이하게 된 하나의 초기 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환경적인 변화 가운데 취업 경험, 사업 기회, 일본인의 퇴출이라는 3개의 조건으로 인해 파친코 홀 사업은 1955년 이후 재일 한인에게 중요한 사업 선택지로서 인식되었다. 일반적으로 취업 경험과 사업 기회는 타 제조업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사업 기회가 계속 증가하는 가운데 일본인의 퇴출이 발생한 사업은 파친코 산업에서만 유일한 현상이었다. 파친코 산업은 재일 한인 공동체 내에 축적된 정보에 근거한 재일 한인의 주체적인 선택의 결과 주요산업으로 발전되었다. 재일 한인의 특징적인 요인으로서는 제조업 등 타 주요 산업의 쇠퇴라는 내적 요인과 파친코 산업의 비즈니스 기회 등이 중복되었던 점, 재일 한인 공동체 내에 축적된 정보 등이 비즈니스 발전을 용이하게 하고 사업으로서 실현 가능하게 하는 자원이 존재했던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비즈니스로서 실현가능하게 하는 자원은 1950년대 전반에 재일 한인 공동체 내에 기본적으로 형성되었다. 1955년 규제를 계기로 형성된 파친코 산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고정화와 비즈니스로서 높은 리스크는 규제 전에 비해 일본 사회의 참여를 제한하는 조건이 되었다. 이에 따라 파친코 산업은 재일 한인이라는 특정 민족 집단의 선택 여하에 의존하는 정도가 커졌다. 재일 한인이 파친코 홀 사업을 선택할 것인가의 여부는 타 사업 선택의 가능성과 비즈니스 기회로서의 우열과 연동되었지만 재일 한인과 파친코 산업의 관련은 다음과 같은 내적 요인이 더욱 중요해졌다. 즉 파친코 산업을 비즈니스 기회로서 인식시킨 환경과 사업화의 실현 가능성을 높였다는 조건에 주목하면 1950년대 전반에 형성된 초기 조건의 자원이 역사적으로 유효한 것으로서 공동체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었기 때문이다.

파친코 산업은 일본 전국에 시장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재일 한인 공동체 내에 재생산되는 정보는 직접적인 경쟁을 유발하지 않는 형태로 공유되어 축적되었다. 재일 한인은 파친코 산업에 종사하는 인수가 증가함에 따라 사람을 매개로 한 전파나 회합, 모임 등 비공식적인 형태로 산업과 관련된 정보를 접하기 쉬운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정보나 사업화를 가능하게 한 기초적인 노하우 등을 재일 한인은 통상의 메이커 루트 이외에도 재일 한인을 통해 습득 가능한 독특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파친코 산업은 전체적으로 참여와 사업화에 필요한 정보가 재일 한인이라는 구분된 민족 내에 상대적으로 집중되었다. 이것은 파친코 홀 사업에서 재일 한인 기업이 경쟁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업 참여와 관련된 인프라 정보가 재일 한인 공동체 내에 재일 한인이 접근하기 쉬운 형태로 접근 가능한 거리에 있었을 뿐이다.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조건에 더하여 특정 민족 집단에 정보가 체류하는 점이 상대적으로 재일 한인의 파친코 홀 사업이 탄생하기 쉽게 해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재일 한인이라는 민족의 틀을 설정하지 않는 한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파친코 산업의 발전에서 재일 한인 공동체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는 인큐베이터적인 역할, 즉 사업의 탄생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게다가 재일 한인 공동체 내의 비공식적인 형태로 진행된 정보의 축적이 민족 금융 기관이라는 경제 조직의 성장과 함께 파친코 산업의 초기 투자에 조직적인 융자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파친코 산업은 대자본의 다이나무와 마루한이라는 양대 기업이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다이나무는 2001년 도야마 점포의 개업을 계기로 전국 100개 점포의 확장을 달성했다고 보고하였다. 다이나무가 파친코 체인점을 시작한 것은 1988년경으로 불과 17년 만에 100개 점포 이상으로 확장되었다. 다이나무는 2003년도 매출액이 7,090억 엔, 경상 이익만도 181억 엔으로, 파친코 홀 업계의 1위를 고수하였다.

한편 마루한 역시 2002년도에 100개 점포 확장을 달성하여 업계 2위로 부상하였다. 마루한은 1957년 도쿄에서 다방·레스토랑을 선두로 볼링 등 다양한 레저 산업을 전개하여 현재 파친코 중심의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2006년 매상 액 1조 엔, 200개 점포 확장을 목표로 세력을 급격히 확장시켰다.

파친코 산업의 과제와 의의

파친코 산업에서 최근 대자본의 참여, 휴일 규제 및 영업 시간, 환금 비율 규제의 사실상의 철폐 등 자유화와 과잉 경쟁으로 인하여 중소 파친코 업자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중소 영세 파친코 업자들이 대형 체인점에 비해 자금, 인재 등에서 열세이지만, 이들 중에서는 명확한 비전이나 튼튼한 재무 기반을 바탕으로 대자본의 공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기업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파친코 산업의 생존 전략으로서 체인점 내 조직 관리의 표준화 및 합리화, 지방 밀착형 산업 정착, 재무 본질의 강화, 파친코 기기의 품질 관리 강화 및 신기종의 선견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경영 전략을 재일 한인 기업가들이 기업 상황에 맞게 실천하기 위해서 기업 경영자 각자의 경험과 노하우에 바탕을 둔 탄탄한 경영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 파친코 산업 전체에 해당되는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최석영, 「그만이 할 수 있는 한류 파친코의 제왕 한창우」(『인물과사상』171, 인물과사상사, 2012)
  • 韓載香, 『パチンコ産業と在日韓国朝鮮人企業』(社會經濟史學, 73-4, 2007)
  • 「在日コリアンとパチンコ産業」(『サイ』5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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