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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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제주도에 감귤 묘목을 기증하여 감귤 농장을 보급하고 제주도 경제에 기여한 제주도 출신 재일 한인들의 이야기.
1965년부터 제주도 출신 재일 한인 사이에서 감귤 묘목을 기증하는 고향 돕기 운동이 일어났으며, 재일 한인 사회에서는 제주 개발협회, 제주도민회, 제주 친목회, 재일경제인협회 등의 단체와 마을 단위 친목회를 통하여 고향에 감귤 묘목 보내기 운동이 본격 전개되어 제주도 고향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재일 제주인은 2011년을 기준으로 재일 한인 545,401명 가운데 86,231명으로 전체에서 약 15.8%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재일 한인 전체 인구 중 경상남북도 다음으로 비중이 큰 것이다. 재일 제주인들은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이나 징병 등으로 이주했거나 해방 이후 제주 4·3 민주 항쟁으로 인해, 혹은 이주 노동자나 출가 해녀 등 제주 지역에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도일한 사례들이다. 재일 제주인들은 현재 도쿄 미카와시마[東京三河島]나 오사카 이쿠노쿠[大阪生野区]를 중심으로 집거하면서 간토[関東]와 간사이[関西] 지방을 중심으로 재일 제주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재일 제주인들은 일본 이민 생활의 온갖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자신들의 삶보다는 항상 고향의 어려운 현실을 걱정했다. 실제로 재일 제주인의 제주도에 대한 애향의 물결은 제주 마을 교량 가설, 도로 포장, 상수도, 전기 전화 시설, 학교 건립, 마을 회관 설립 등으로 나타났으며 제주도 마을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제주 지역의 감귤 산업은 1950년대까지 서귀포 지역이 일부 농가에서만 재배되었다. 감귤 재배의 단위 면적 생산량은 1953년 17㏊ 6톤, 1960년대 64㏊ 190톤에 불과하여 농가 소득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중반부터 제주도 출신 재일 제주인들이 일본에서 고향땅으로 감귤 묘목을 조금씩 기증하면서 제주도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대략 1965년부터 제주도 출신 재일 한인들이 감귤 묘목을 기증하여 일대 고향 돕기 운동이 한인 사회에서 일어났다. 이 무렵 재일 한인 사회에서는 제주 개발협회, 제주도민회, 제주 친목회, 재일경제인협회 등의 단체와 마을 단위 친목회를 통하여 고향에 감귤 묘목 보내기 운동이 전개되었다. 1968년도부터 제주도의 감귤 산업은 직접 청와대 농특 사업으로 확정되어 저리 융자로 감귤원 조성 자금을 지원받았다. 1960년대 말에는 한국 정부가 감귤 산업 발전을 위한 정책을 실시한 이후 온주 감귤 재배는 서귀포를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이를 계기로 제주도는 1965년부터 감귤 재배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 무렵 재일 제주인 사회에서는 재일 제주인 관련 단체와 마을 단위 친목회를 중심으로 제주도 고향에 감귤 묘목을 기증하기 시작했다. 당시 제주 개발협회는 양질의 묘목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하여 1967년도에만 29,000그루의 묘목을 기증하였다. 도쿄의 제주 개발협회는 1959년을 기점으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재일본 간토 지역 제주도 재일 제주인 단체는 대부분 제주 개발협회로 명칭을 바꿨었다. 제주 개발협회라는 단체는 이름이 보여 주듯이 제주도 발전과 개발을 위해 조직된 단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제주 개발협회는 조직되자마자 많은 일들을 전개했는데 대표적으로는 고향 제주에 감귤나무 보내기 사업이었다. 당시 재일 제주인들이 감귤나무에 주목하게 된 배경에는 동경 거주 동포들이 일본 선진지 감귤 재배 농가의 감귤 기술과 맛, 수익을 눈여겨보았고 제주도의 토양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제주도 내 10여 농가는 대학나무[제주 감귤을 팔아 대학을 보냈던 시절에 감귤나무]의 신화를 겪고 있었다. 그리고 재일 제주인들은 감귤 산업에 눈을 돌렸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계기로 제주는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1961년 5월 30일에 김영관(金榮寬) 해군 준장이 제12대 제주지사에 취임하여 6월에는 제주도 재건국민운동촉진회를 발족하였다. 정부에서는 제주도 개발에 강한 관심을 보였고 1961년 9월에는 박정희 의장이 1962년 연두에 제주도를 방문하여 수산 자원의 개발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1961년 10월에는 ‘제주도 개발의 노래’가 선정 발표되는 등 개발의 열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한라산 횡단 도로, 제주시 간선 도로의 포장 공사, 중산간 마을의 급수 해결을 위한 상수도 공사 등을 비롯하여 제주~목포 간 및 제주~부산 간의 호화선 취항, 주 2회였던 여객기가 매일 2회 제주~서울 간을 운항 등 잇따른 정책발표로 날마다 눈부시게 변모해 갔다.
1963년 2월 23일, 제주 개발협회 제2회 상임이사회에서 4월의 식수기를 맞이하여 향토 녹화운동추진의 일환으로써 묘목 보내기 운동을 권장하고 기증자에게는 적극적으로 편의를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김영관 지사의 요청에 의해 해군사관학교에 벚꽃 묘목 2,000그루를 보낼 것을 약속하고 김평진 회장이 개인 부담했다. 제주도 농업 진흥을 위해 고원일 3,000그루, 진중팔 2,000그루, 강완배 10,000그루의 감귤 묘목을 보냈다. 특히 진중팔은 앞으로 10년간 계속해서 보내 줄 것을 약속했다. 묘목 인수에는 부산에 있는 고장화와 전 제주시장 김차봉이 도움을 주었다. 재일 제주인들이 1965년부터 1969년까지 기증한 묘목 및 수입 묘목 또는 재산 반입 명목으로 들여 온 감귤 묘목 수는 총 1,733,711그루였다. 이때부터 재일 제주인 친목 단체 등 재일 한인 사회로부터 기증하는 묘목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수입 묘목은 1970년도에 1,519,300그루 정도 들여온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당시 제주도에서는 1년에 1백만 그루 이상의 묘목이 기증, 수입, 재산 반입 등의 형태로 들어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증 묘목에 대한 수입 지침을 강화하고 수입을 제한하였다. 당시 감귤 묘목의 기증 문제는 단순히 묘목의 수요와 공급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닌 제주도 전체의 경제 발전 방향과 재일 제주인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이때 결정한 기증 묘목 수입 제한 이유를 살펴보면 감귤은 20년 후 성수기에 도달하는 관계로 조성 단계에서 자칫 잘못하면 백년대계를 그르칠 우려가 있으므로 현재 상황을 참작하여 품질 향상의 토대 구축을 마련할 목적으로 1970년 봄 수입 본수[기증, 수입 등]를 60만 본으로 제한하였다. 수입 본수를 60만 본으로 제한하자 재일 한인 단체에서는 재일 한인의 향토 개발 투자에 지장이 많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다. 1970년도 봄에 기증 및 수입 묘목으로 공급할 묘목 본수를 60만 본[그루]으로 정했으나 실제는 1,604,300본으로 1백만 본이 초과되는 양이 공급되어 행정적 통제력이 상실될 정도였다. 감귤나무는 1965년도부터 재일 제주인로부터 기증 묘목과 수입 묘목이 제주에 들어와 심기 시작하여 1970년도에는 1년에 1,604,000본이 식재되어 1년에 심어진 본수로는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많은 본수였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기증 묘목 및 수입 묘목 또는 재산 반입으로 들여 온 총 본수는 1,733,711본이며 수입 묘목 본수는 수입업자가 수입 허가를 받고 수입하여 판매되었다. 1969년부터는 재일 한인 사회로부터 기증되는 묘목이 급격히 증가하여 수입 묘목의 양은 더욱 감소하였다. 당시 수입 제한 이유로 장차 국제 경쟁에 대한 대비와 국민의 기호에 알맞은 품질 개량으로 계통이 확실한 묘목을 수입하고 도민의 관심을 품질 향상의 방향으로 유도한다는 방침이었다. 특히 당시로서 국제 경쟁에도 대비한다는 의미도 강했다. 당시 제주도는 감귤 묘목이 기증, 수입, 재산 반입의 형태로 1년에 1백만 본 이상이 들어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증묘목에 대한 수입 지침을 강화하고 수입 제한 조치를 하였다. 이후 감귤 묘목은 일본에서 기증하여 수입되는 양도 점차 감소하기 시작하여 1979년도를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재일 제주인들은 감귤 묘목의 기증 이외에도 기술 연수생을 선발하여 일본에서 감귤 재배 기술을 습득하여 보급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또한 일본 감귤 재배 전문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현지 지도에 나서는 한편 감귤 산업의 발전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1963년 4월에는 제주도에 보내진 묘목이 세금이 부가된다는 연락이 있어 각 방면에 선처를 호소했다. 이와 함께 제주도에 잠재하고 있는 풍부한 산업 개발 자원을 어떻게 발굴하고 활용할 것인가는 오로지 인재 육성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여 제주 개발협회는 기술 연수생 초청에 관심을 두고 노력을 경주했다.
기술 연수생 초청 사업은 처음에는 1962년 제주 개발협회 정기 총회에서 사업 목표로 책정되었으나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1964년 2월 정기총회 이후였다. 1964년 4월 연수생 명부 작성에 대한 작업이 시작되어 제주도지사로부터 명단과 이력서 등을 통보받고 1964년 6월에는 초청장 및 신원 재정 보증서, 왕복 선박 비용[부산-제주]을 보냈다. 이후 일본 대학 농예학부에 대한 연수생 실습 승낙을 요청하고 법무성에도 선발 경과 및 경비 대우 등 사정 설명회를 개최하는 등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가나가와[神奈川]현, 치바[千葉]현 및 시즈오카[靜岡]현 당국 등과 협의 교섭을 반복하여 효과적인 연수가 되도록 알선을 의뢰했다. 입국 심사 등 수속에 대해서는 ‘아시아 친구의 모임[亞細亞友の會]’의 협력을 요청했다. 초청에 있어서는 교통비, 기숙사, 연수 장소뿐만 아니라 침구, 의료, 식사 등 여러 가지에 걸쳐서 면밀한 검토와 준비를 거쳐 1965년 1월 20일 연수생 10명을 맞이하였다. 일행은 전문별로 실습 중심의 연수 활동에 들어가 1966년 1월 11일 수료식 날까지 1년간 기술을 습득하였다. 기술 연수생은 제주 개발협회가 제주도지사에게 초청 계획의 취지와 목적을 전하고 제주도 당국에서 연수생선발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선정되었다.
제주 개발협회는 일찍부터 감귤 재배의 유망성에 착안해서 선구적으로 감귤나무의 도입을 추진해 왔으며 그러한 선견성이 좋은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재일 제주인의 고향 제주도에 감귤 보내기 운동은 도쿄의 제주 개발협회[재일북관동(北関東)제주도민협회 전신]가 처음 시작했지만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관서(関西) 지역 교민들도 함께 참여하여 관동 지역 교민들에게 뒤지지 않는 기증 사업을 펼쳤다. 오사카에는 재일본제주도민회, 제주도 친목회, 재일경제인협회 등 교민 단체가 이미 조직되어 있었다. 이 단체들은 도쿄의 제주 개발협회 간부들과 각종 정보를 교환하면서 감귤 묘목 보내기 운동에 동참했다.
재일 제주인의 제주도민 소득 증대를 위한 사업으로 추진한 밀감 묘목의 기증은 제주도 당국의 국내산 조달 방침에 따라 1979년까지 전개되었다. 제주 개발협회는 지금까지의 성과를 마무리하고 최종 연도라는 점에서 1979년 3월 17일 25만 본, 3월 24일 18만 본, 합계 43만 본으로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은 묘목을 보냈다. 이때까지 제주 개발협회 알선에 의해 제주도에 기증된 밀감 묘목은 누계 200만 본에 달했다. 밀감 재배의 지역적인 적합성은 인정되었으나 제주도민이 그다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을 때, 감귤의 장래성을 예견하고 대량으로 감귤 묘목 도입을 추진하는 데 제주 개발협회가 이룩한 업적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제주도는 재일 제주인 1세들의 기증과 투자로 눈부신 경제 발전을 달성하였다. 제주도의 감귤 생산은 1946년 10톤에서 2011년 648,000톤[64,800배], 2013년 12월 651,000톤[65,100배]을 초과 생산하였다. 감귤 수입은 2005년 6006억 3900만원, 2010년 6500억원, 2012년 8011억 7500만원으로 해마다 증가하여 제주도민의 농가 소득도 대폭 증가하였다. 재일 제주인들의 이러한 제주도 고향에 대한 공헌은 재일 제주인의 애향심과 제주 사회의 기증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정립시켜 나가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1965년부터 1984년까지 20년간 재일 제주인들이 고향에 기증한 감귤 묘목[묘목 4,267,000그루]은 제주도 감귤 산업을 부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재일 제주인들은 제주도 발전을 위해 심적·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교육 문화 사업을 비롯한 관광 산업과 금융 경제 분야에 이르기까지 직접 자본을 투자하였다. 재일 제주인 1세들의 기증과 투자 활동은 제주 지역 산업 발전과 도민 소득 향상에 큰 축을 형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