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산(力道山), 일본을 메치다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정의

재일 한인 출신의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활동과 일본에서 활동하는 재일 한인 스포츠인의 동향.

개설

역도산(力道山)의 본명은 김신락(金信洛)으로 1924년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신풍리에서 김석태(金錫泰)의 3남 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39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모모타 미쓰히로[百田光浩]로 개명하였고 1940년 일본 스모계에 입문하여 역도산이란 이름으로 약 10년간 활동하였다. 1950년 스모계를 은퇴한 이후에는 프로레슬러로 전향했다.

역도산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

역도산은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그 이름과 활약이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이지만, 실제로 인물 조사의 바탕이라 할 수 있는 출생이나 도일 배경, 스모 선수 시절 등에 대해 사실적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역도산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기억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고, 역도산이 집필한 자서전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역도산의 출생만 보더라도 “공식적으로는 1924년이라고 알려져 있는 가운데 1922년이라는 의견과 1923년이라는 의견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라는 지적이 있으며, 도일한 배경을 두고도 “종종 씨름 대회를 구경하려 왔던 일본인 모모타가 이 소년(역도산)을 눈여겨보고 일본으로 데리고 가 스모 선수로 키울 생각이었다.”, “김신락이 17살 되던 해의 봄, 경성에서 열린 씨름 대회에서 그를 본 조선총독부 소속 경부보 오가타 도라이치의 권유로 김신락은 자신이 동경하던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등의 상이한 진술이 존재하고 있다. 또한 재일 조선인으로서 일본의 국기(國技)인 스모 선수로 활동하는 데에 일어날 수 있는 민족적 차별과 은퇴 배경에 대해서도 기록 내용이 상충하고 있다. “스모의 최고 자리인 요코즈나를 바라볼 수 있는 실력을 가졌으면서도 세키와케의 자리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모두 그가 조선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마침내 민족적 차별과 까닭 없는 멸시에 대한 분노로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스스로 상투를 식칼로 잘라 버리고 스모계를 떠났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역도산 자신은 스모계를 은퇴한 이유로 스모 협회에 대한 불신을 꼽으며 “폐 디스토마에 걸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선수에게 협회는 아무런 보장도 해 주지 않았다. (…) 내가 역사(力士) 생활을 포기한 직접적인 동기는 단 한 가지뿐으로 그것은 협회에 있다고 단정하고 싶다.”고 술회하며 철저하게 민족 차원의 차별 담론과는 구분을 지으려고 했다.

해방 후 일본에 투영되는 역도산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기억과 기록이 산재하는 탓에 역도산에 대해 명확하게 기술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말하자면 역도산은 조선인 레슬러로서 ‘가라테 촙’을 연발하며 백인이나 흑인을 쓰러트려, 전후 일본인을 패전 후의 심리적 공황에서 벗어나게 해 준 ‘영웅’으로서, 신화적으로 존재하는 인물에 가깝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실존 인물이지만 드라마, 영화, 소설 속의 신화적 인물로 기억하고자 하는 욕망 속에 역도산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 사회에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유통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패전 후의 조선인 혹은 재일 한인에게는 ‘무법’, ‘악당’이란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었고 때문에 스테레오 타입의 편견은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전후 일본과 역도산은 서로 대립각을 형성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다시 말해 재일 한인에 대한 불신과 생리적인 거부감에 가까운 혐오는 역도산에게도 전이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역도산은 일왕 다음으로 유명한 전후 일본의 ‘영웅’으로 존재했다. 전후 일본이 역도산의 신체를 매개로 미국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려 했다면, 그보다 앞서 전후 일본과 역도산의 동일시 과정이 이루어져야 했다. 전후 일본은 역도산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투영시켰을까.

사실, 역도산이 프로레슬러로 데뷔하기 이전부터 다수의 일본인이 프로레슬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유도의 귀신’이라 불리는 기무라 마사히코[木村政彦]를 비롯하여 역시 유도 선수 출신인 야마구치 도시오[山口利夫], 스모 선수 출신의 오오노 우미[大ノ海], 후지타 야마[藤田山]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한 가운데 유독 역도산에게만 관심이 집중되고, 오로지 역도산만 기억되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물론, 역도산의 출생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이 역도산이 재일 한인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실제로 역도산이 재일 한인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상식이었는지는 증명하기 힘들다. 한 평론가에 따르면 역도산의 어릴 적 이름이나 출신 교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아무도 본인에게 물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후배 스모 선수 가쓰라야마 한타로조차도 ‘일본인과 조선인의 혼혈’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증언은 스모 선수 당시 역도산이 조선에서 건너왔다고 하는 사실을 선후배 도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었다는 진술과 대치한다. 또 역도산이 프로레슬러로서 인기를 구가하던 1955년경, 이미 “역도산은 조선인이다.”라는 소문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출생의 비밀 심층 탐구되다

역도산의 출생에 관한 혼돈과 착종은 미디어 보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역도산의 스모 선수 은퇴 시, 『마이니치신문』은 본명을 모모타 미쓰히로로 소개하고 나가사키[長崎県]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었다[1950. 9. 13)]. 또한 역도산이 생을 마감했을 때에도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은 모두 역도산이 나가사키현 오무라시[大村市]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1963. 12. 16]. 이와 같이 역도산은 공식적으로는 일본에서 태어나 스모 선수와 프로레슬링 선수로 활약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역도산이 죽기 전에 한국을 방문한 사실을 보도할 때[1963. 1. 8 방문], 『도쿄주니치신문』은 역도산이 방문한 곳이 다름 아닌 역도산의 ‘모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1963. 1. 9]. 역도산의 출생이 명확해지기 시작한 것은 역도산이 죽은 뒤였다. 주변인들의 기억과 증언의 형태로 ‘사실’이 복원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1973년 사노 미쓰오[佐野美津男]는 잡지 『아사히저널[朝日ジャーナル]』[1973. 4]을 통해 역도산이 재일 한인이었음을 입증하려 했다. 1977년에는 우시지마 히데히코[牛島秀彦]가 잡지 『우시오[潮]』[8월과 9월호]에서 역도산의 진실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하였고, 이후에도 우시지마는 면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심층 해류의 역도산(深層海流の力道山)』[徳間文庫, 1983], 『역도산-스모·프로레슬링·사회 뒷면(力道山─大相撲·プロレス·ウラ社会)』[第三書館, 1995]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역도산이 생존했던 당시에는 드라마나 TV 중계, 영화를 통해 신화화, 영웅화되었던 것에 반해, 사후에는 ‘진실’과 ‘사실’을 밝혀내려 했던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는 역도산이 생존하던 시절, 엄밀히 말하면 프로레슬러로 활약하던 당시, 전후 일본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본인’ 역도산만이 필요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전후 일본은 역도산을 통해 점령자 미국인에 대한 굴절된 감정을 발산하고, 나아가 지난날의 패배를 설욕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역도산의 신체를 통해 건강한 ‘남성’ 일본으로 부활하게 되었다는 환영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전후 일본은 일본과 미국의 대결이라는 구도 속에서 역도산의 경기를 해석하였고, 나아가 역도산의 승리를 자신의 승리로 소유하고자 하였다.

해방 이후 일본 남성성의 회복

역도산이 전후 일본을 대신하여 링에 처음으로 오른 것은 1951년 10월 28일로, 상대선수는 역시 미국에서 온 바비 브룬스(Bobby Bruns)였다. 당시의 역도산은 트레이닝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가라테 촙이라는 필살 무기도 없었을 뿐더러, GHQ의 윌리엄 머컷트 소장이 회장으로 있는 사회 사업 단체 ‘토리이 오아시스 슈라이너스 클럽(Torii Oasis Shriner’s Club)’이 미군 위문과 지체 장애자 성금모금을 위하여 마련한 경기였으므로 관중도 대부분이 미국인이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역도산은 바비 브룬스와 대결하여 무승부를 기록했고, 이후 약 1년간 미국에서 수행을 한 후, 1954년 2월 19일, 미국의 샤프 형제와 역도산 그리고 기무라 마사히코는 태그 매치에서 3연전을 벌여 2대 1로 승리하게 된다. 말 그대로 과격한 육탄전 끝에 기어이 일본이 미국을 제압하고 말았다는 흥분 때문에 텔레비전 중계를 보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한 이도 있을 정도였다. 이 경기를 통하여 유도의 귀신이라 불리던 기무라 마사히코도 역도산의 저돌적이고 치명적인 무기와 경기 운영 방식 때문에 존재감을 잃게 되었다.

전후 일본은 역도산의 출생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봉인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피식민자를 통한 전후 일본 남성성의 회복은 또 다른 콤플렉스를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3등 국민인 조선인, 대만인보다 못한 4등 국민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만약 전후 일본이 역도산을 대상화시켜 버린다면, 자신들의 ‘남성성’도 동시에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역도산이 생전에 허구의 일본인으로 존재하고, 사후에 실제적 조선인으로 존재하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해방후 상실된 일본의 정신사 대변

그렇다면 역도산 자신은 어떠한 존재이고자 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역도산 역시 스스로 ‘일본인’이고자 하였으며, 일미 대립 상징극의 주인공이고자 했다. 일본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스모 선수 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었던 역도산은 이번에는 프로레슬링을 통하여 ‘일본인 되기’에 성공하였다. 물론 역도산이 성공적으로 일본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프로레슬링이라는 장르]을 도구화하였기 때문이며, 적어도 프로레슬링이 이루어지는 무대[링] 위에서 전후 일본과 역도산의 극복 대상이 동일하였기 때문이다. 역도산은 하와이 등 미국에서 연습과 시합을 거듭하면서, 프로레슬링을 통해 인종적 대립을 극대화시켜, 관객들을 자극시키고 흥행에도 성공할 수 있음을 터득한 것 같다. 아직 진주만 공격과 같은 전쟁의 기억이 선명하던 당시, 미국에서는 일본계 레슬러가 등장하면 가차 없이 야유를 퍼부었고, 그러한 악역이 있었기 때문에 프로레슬링은 인기를 모을 수 있었다. 흥행과 수입이 직결되는 프로레슬링의 성격 때문에 일본 레슬러들은 손님을 모으기 위해서라도 전략적으로 악역을 연출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전장의 기억을 역이용하여 미국인의 적개심을 자극했던 것이다. 일본이 가지는 악역의 상징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미국이름을 가지고 있던 일본계 레슬러들도 링 위에서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어 사용했다. 예를 들면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를 떠올리게 하듯, ‘그레이트·도고’로 명명하거나, 도조 히데키[東条英機]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를 섞어 ‘도조·야마모토’ 등으로 바꾸어, 미국인에게 전쟁의 상흔과 아픔, 복수심을 자극했다. 역도산의 경우에는 이러한 인종적인 대결 구도를 역으로 제시하였다. 즉 악역을 연기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미국을 악역으로 상정하고 그들과 싸워 이김으로써 패전 일본의 신체를 부활시키는 상징극 시나리오에 충실하고자 했다. 전쟁 중에는 수용소에 가두어지고, 패전 후에는 굴욕과 모멸감에 사로잡혀 주눅 들고 고개 숙일 수밖에 없던 하와이의 일본계 사람들은 역도산이라는 영웅의 등장에 환호를 보냈다.

역도산의 피니시 기술인 가라테 촙도 역도산과 전후 일본이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반칙을 주로 사용한다거나 관절기를 주로 사용하는 선수, 공중 기술을 사용하는 선수 등, 프로레슬링의 다양한 기술은 선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주요한 요소가 된다. 모든 선수가 자신만의 고유하고도 최상의 기술을 적어도 하나씩은 소유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이다. 역도산의 가라테 촙은 스모의 기술을 변형시킨 것으로서 보기에는 화려하지 않지만, 일본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었기에 역도산이 누구를 대표하며, 무엇을 위한 대결인지를 잘 표현해 주었다.

이러한 고유 기술의 구사는 관중들과 선수와의 정념적 차원의 소통을 전염병처럼 확산시킨다고 한다. 공방을 주고받으며 경기가 팽팽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관중들은 경기를 승리로 이끌기 위한 피니시 기술이 등장하기를 기다리고, 이 피니시 기술이 등장하는 순간 관중의 환호성은 더욱 거세지며 경기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 지도 예상한다. 그리고 이러한 순간에 관중과 선수는 인지적, 정념적, 실행적 차원에서 소통하게 된다. 역도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경기가 후반으로 갈수록 관중들은 가라테 촙이 등장하기만을 기다리고, 가라테 촙이 악의 상징인 미국을 공격하고 결과적으로 승리를 얻는 가운데 전후 일본과 역도산은 감정의 일치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역도산의 경기를 통한 전후 일본의 남성성 회복은 바로 링이라는 공간 내에서 이루어지는 상징극을 통해 달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역도산은 유명세에 힘입어 안토니오 이노키, 김일, 자이언트 바바 등과 같은 유명 프로레슬링 선수들을 길러 내기도 했다.

부동산 사업 등 사업가로 변신

한편, 역도산은 사업가로서도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도쿄 아카사카[赤坂]에 고급 아파트 리키 아파트와 고급 임대 주택인 리키 맨션을 건설하는가 하면 나이트클럽 ‘클럽 리키’를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시부야[渋谷]에 리키 스포츠 팰리스라는 이름의 빌딩을 세워 프로레슬링 상설회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또 교외에 자동차 경주장, 사격장, 실내 빙상장, 골프장 등을 건설하는 계획을 세워 회원권을 판매하며 일부 공사도 착수했지만 이 사업은 역도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미완에 그치고 말았다. 1963년 12월 8일 심야에 도쿄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폭력단 일행의 칼에 복부 부상을 입은 후 역도산은 12월 15일 40세의 나이로 결국 사망하였다. 당시 역도산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의료 과실, 음모론 등 여러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마지막까지 전설로, 신화로 남은 역도산은 재일 한인과 전후 일본을 때로는 유착시키면서 때로는 유리시키면서 전후 일본의 정신사를 대변하였다.

일본 체육계에서 활약한 한국계 스포츠인

프로 야구에는 하리모토 이사오[본명 장훈. 전 프로 야구 선수, 재일 한인 2세], 긴조 아키요[전 프로 야구 선수, 재일 한인 2세, 긴조 다쓰히코의 아버지], 후쿠시 히로아키[본명 장명부, 전 프로 야구 선수], 이 케이이치[전 프로 야구 선수], 가네무라 요시아키[본명 김의명, 전 프로 야구 선수, 재일 3세], 가네모토 도모아키[전 프로 야구 선수], 아라이 타카히로[본명 박귀호, 프로 야구 선수], 아라이 료타[프로 야구 선수], 니우라 히사오[본명 김일융, 전 프로 야구 선수], 후지모토 히데오[전 프로 야구 선수] 등이 있다. 격투기에는 초슈리키[본명 곽광웅, 통명 요시다 미츠오, 야마구치현 출신, 재일 한인 2세], 홍창수[통명 도쿠야마 마사모리, 프로 복서, 조선 국적이었으나 현재는 한국 국적, 재일 한인 3세], 호시노 간타로[본명 여건부, 통명 호시노 다쓰오, 전 프로레슬러, 프로모터, 효고현 고베시 출신], 오오키 긴타로[본명 김일, 전 프로레슬러, 한국 전남 출신], 가네무라 긴타로[본명 김행호, 통명 가네무라 유키히로, 프로레슬러, 한국 국적, 미에현 츠시 출신], 박정현[태권도 국제 사범, 오사카 출생, 시가현 출신. 재일 한인 3세], 마츠이 쇼케이[본명 문장규, 전 극진 가라테 선수, 도쿄도 분쿄구 출생, 지바현 출신의 재일 한인 2세] 등이 있다. 프로 축구계는 정대세[축구 선수, 한국 국적 재일 3세, 나고야시 출신], 안영학[프로 축구 선수, 조선 국적,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 출신], 박강조[축구 선수.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출신], 김영기[프로 축구 선수, 재일 한인 3세, 효고현 히메지시 출신], 양용기[프로 축구 선수, 조선 국적, 오사카부 센보쿠군 다다오 카초 출신], 이한재[프로 축구 선수, 조선 국적,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 출신], 이창강[축구 선수. 나고야 아이치현 출신], 황성수[프로 축구 선수, 도쿄도 출신], 손정윤[축구 선수. 야마구치현 출신], 김명휘[축구 선수. 효고현 출신], 김성용[축구 선수, 도쿄도 출신], 강현수[프로 축구 선수, 오사카부 출신], 강성호[축구 선수, 도쿄도 출신], 고경태[프로 축구 선수, 재일 한인 3세, 도쿄도 출신]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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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리타 노보루, 『인간 역도산』(윤덕주 옮김, 엔북, 2004)
  • 다나카 게이코, 『내 남편 역도산』(한성례 옮김, 자음과 모음, 2004)
  • 무라마츠 도모미, 『조선 청년 역도산』(오석윤 옮김, 북앳북스, 2004)
  • 성민수, 『프로레슬링 흥행과 명승부의 역사』(살림출판사, 2005)
  • 이타가키 류타, 「동아시아 기억의 장소로서 역도산」(『역사비평』95,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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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石井代蔵, 『巨人の素顔』(講談社, 1980)
  • 村松友視, 『当然プロレスの味方です』(情報センター出版, 1980)
  • 村松友視, 『力道山がいた』(朝日新聞社, 2001)
  • 大下英治, 『力道山の真実』(祥伝社,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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