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在日デイアスポラ文学, アイデンティティ, 在日文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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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원어 항목명 | 在日デイアスポラ文学, アイデンティティ, 在日文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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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조선인], 혹은 조선계 일본인이 쓴 문학 작품을 이르는 총칭.
재일 디아스포라 문학 또는 재일 문학은 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조선인], 혹은 조선계 일본인이 쓴 문학 작품을 총칭하는 용어이며, 재일 조선인 문학, 재일 코리안 문학, 자이니치 문학이라고도 통칭한다.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은 우리말로 민족 분산, 민족 이산으로 번역된다. 그리고 이주자는 이중 언어와 이산 자아[자기 정체성], 다문화적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자기 정체성 추구나 고국에 대한 향수, 문화 간의 혼종성, 타국에서의 차별이라는 상황 속에서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특히 일본에서의 디아스포라 삶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재일 디아스포라 문학, 재일[자이니치] 문학이라고 한다.
이러한 문학은 재일 이민 1세대와 이민 2세대, 3세대 간의 세대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재일 이민 1세대는 떠나온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노스텔지어를 원초적인 감수성으로 갖고 있는 반면, 재일 이민 2세대와 3세대는 조국과 민족의 문제, 국가와 개인의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디아스포라의 삶을 묘사한다. 김태생, 허남기, 김달수, 김석범, 김학영, 현월, 이회성, 리기승, 원수일, 김중명, 양석일, 이양지, 유미리, 가네시로 가즈키 등이 재일 문학가의 계보를 잇고 있다. 이들의 문학은 경계인으로서 초국가주의적 의식이나 정체성에 대한 회의와 방황, 보편적인 인간의 실존 등 세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 걸쳐 재일 문학을 ‘민족 문학’으로 파악하는 국문학 분야에서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재일 문학을 디아스포라 문학으로 파악하는 시점은 유럽에서도 공유되는 시각이다. 국문학은 작가의 국적, 발표 장소, 모어를 기준으로 성립된다. 그러나 디아스포라 문학이 모국어가 아닌 타국의 언어[일본어]로 쓰일 때 이를 국문학으로 볼 것인가, 외국 문학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이해 차가 발생한다. 최근의 경향은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면서 탈국경, 다문화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문학적 상상력을 하나의 문학 영역으로 인정하고 있다. 즉 민족 문학의 한계에서 벗어난 세계적 보편성을 띤 문학의 영역이 그것이다. 이런 면에서 재일 문학은 탈경계, 탈중심을 주제로 한 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대표적인 디아스포라 문학으로 인정받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김석범 『화산도』, 이회성 『유역』, 『백 년의 여행자들』, 이양지 『유희』, 『돌의 소리』, 사기사와 메구무 『개나리도 꽃, 벛꽃도 꽃』, 김학영 『향수는 끝나고 우리들은』, 유미리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풀 하우스』, 『가족시네마』, 양석일 『피와 뼈』, 가네시로 가즈키 『GO』 등이 있다. 문학 작품 외에 사상가 서경식의 책 『디아스포라 기행-추방당한 자의 시선』, 『역사의 증인 재일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눈』,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그리고 윤건차의 『자이니치의 정신사』, 『일본 그 국가 민족 국민』, 『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 『교착된 사상의 현대사(1945년 이후의 한국·일본·재일 조선인)』 등도 재일 디아스포라 정신사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재일 조선인이 쓴 문학 작품의 첫 예는 1883년 이수연이 쓴 작품을 들 수 있는데, 한문을 중심으로 쓰였다. 그 후로 1905년 전후에서 1930년에는 유학생들이 거주하면서 한국어로 문학 활동을 많이 했다. 『친목회 회보』[1896]나 『학지광』[1914~1930]까지 6종·100권 남짓이 출판되었다. 이광수, 최남선, 전영택 등, 당시 일본 유학생들은 국권 회복·구습 타파 등을 목적으로 한국어 소설, 시, 수필 등을 발표했다. 또한 동포들의 계몽과 한국 근대 문학의 창조에도 노력했다. 조선인이 일본어 문학 활동을 실시하게 된 것은 1920년대에 일본에 프롤레타리아 문학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부터이다. 일본 프롤레라티아 문학 잡지로 작품을 발표한 작가는 정연규, 한식이 있고, 시인으로 김용제, 백철, 강문연 등이 있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해체되기 시작했을 무렵에 장혁주는 1932년 「아귀도」로 일본 문단에 등장했고, 일제 강점기 조선 농민의 현실을 문학적으로 표현해서 호평을 받지만 나중에 친일 행위에 가담하게 된다. 1939년 가을에 김사량이 「빛 속으로」를 창작하며 새로운 문학적인 저항자로 등장한다. 이은직의 「흐름[ながれ]」과 함께 1939년에 제10회 아쿠다가와 상 후보가 되기도 했다. 홍종우의 장편 소설 『월은산』, 한식의 시집 『고려 마을』 등이 이어서 간행되고, 1940년부터 1942년에 『예술과』[일본 대학 예술과 발행]에서 공부하고 있던 김달수, 이형직 등 젊은 세대가 등장한다.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는 일본 제국에 대항해서 반일제주의를 문학적으로 표현했고, 재일 한인 문학가의 다양한 투쟁의 토대를 의식적으로 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민주조선』, 『조선문운』이라는 잡지가 간행되었고, 김달수, 이형직, 박원준, 장두식, 윤자원, 시인 미순,허남기 등이 활동했다. 김달수는 1954년 『현해탄(玄海灘)』으로 해방 전 조선인 지식인의 민족적인 자각을 묘사하며 일제의 식민지 통치의 비인간성을 표출하였다. 장두식은 1966년 『어느 재일 조선인의 일기[ある在日朝鮮人の記録]』를 발표하며, 재일 조선인의 고난에 가득 찬 삶을 자신의 손으로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이형직의 『표류』, 김석범의 『까마귀의 죽음[鴉の死]』, 김달수의 『태백산맥』 등 민족 분단의 근원으로의 추급이 재일 문학 내에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에 걸쳐서는 이회성, 김학영, 고사명, 김태생, 정승박, 정귀문, 유광석, 이춘목, 양석일, 시인 김시종, 갑유인, 비평가 안우직, 윤학준 등이 등장한다. 이회성은 1972년에 「다듬이질을 하는 여인[砧をうつ女」으로 제66회 아쿠다가와 상을 수상했고, 재일 한인 2세의 민족적 주체 확립과 조국 통일 운동 참여를 테마로 활동을 계속하여 장편 소설 『이루지 못한 꿈[見果てぬ夢]』[1979년]에서 결실을 맺었다.
1980년대 이후로는 이승옥, 김병두 등이 민족 분단의 상흔이나 민주화 투쟁을 그린 한국 문학의 번역·소개를 정열적으로 하게 된다. 새롭게 등장한 이양지[1989년 『유희』로 제100회 아쿠다가와 상 수상], 이기승[1985년에 「제로한[ゼロハン]」으로 군조 신인 문학상 수상] 등은, 일본뿐만이 아니라 조국, 한국을 포함해서 자아 의식의 자유, 특히 감정적으로 고난한 삶을 살아 온 조선계 재일 한인 2세의 이중적 소외감을 묘사했다. 시인 최화국은 1985년에 「묘담의」로 제35회 H씨 상을 수상한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서는 재일 문학의 세계에도 다양하고 의미가 큰 변화의 시대가 펼쳐친다. 첫 번째는 정치적인 관계이다. 1980년 5월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군사 쿠테타는 재일 조선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982년 김달수 등 3명이 고향에 성묘하러 갈 목적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출국했지만, 이것은 전두환 정부를 용인하는 것과 같아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1987년의 노태우 6·29 민주화 선언으로 한국 사회가 민주화로 크게 발전했고, 1988년의 서울 올림픽 개최에 따라서 국제적인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서 한국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김석범은 편수가 많은 책인 『화산도(火山島)』의 완성을 위해서 제주도를 방문했고, 1998년에 전체 7항을 완결했다. 이회성은 김대중 정권이 출범한 뒤에 국적을 한국 국적으로 바꾸려고 해서 화제가 되었지만, 작품에서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사할린섬을 방문해서, 구 소련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의 역사를 그린 『유역[流域へ]』[1992년], 그리고 장편 소설 『백 년의 여행자들[百年の旅人たち]』[1994년]을 발표했다. 이러한 제1세대, 제2세대의 작가들이 고국과 관련된 일이 있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고, 다음 세대는 그것과는 또 다른 조국과의 갈등을 문학의 주제로 삼게 된다. 이양지는 1982년 『나비타령[ナビ·タリョン]』이라는 소설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후 서울에서 유학한 체험을 바탕으로 1988년 『유희』를 썼다. 『유희』에서 이양지는 조국이 자신의 나라일 수가 없었던 재일 유학생의 갈등을 그렸다. 이양지는 『유희』를 통해서 1988년도 하반기에 아쿠다가와 상을 수상하였고, 한층 더 미래가 기대되었다. 안타깝게도 이양지는 장편 소설 『돌의 소리[石の声]』를 집필하던 중 37세로 사망했다. 이양지의 다음 세대인 사기사와 메구무도 할머니의 고향인 한국에 어학을 배우러 유학한 체험을 바탕으로 쓴 수필인 『개나리도 꽃, 벛꽃도 꽃[ケナリも花, サクラも花]』[1994년]을 발표하였다.
한편, 과작 작가로 활동하던 김학영은 「향수는 끝나고 우리들은[郷愁は終り, そしてわれらは―]」[1983년]을 쓴 뒤에 1985년에 자살하였다. 다음 해인 1986년에는 재일 조선인 1세대 작가로 활동하던 김태생이 사망하고 1988년에는 허남기가, 1997년에는 김달수가 사망했다. 그리고 상기에서 소개한 이양지나 사기사와 오구미 외에 리기승, 원수일, 김중명, 유미리, 현월이라고 하는 재일 조선인 신세대 작가가 등장했다. 이를 재일문학에 있어서 세대 교체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중에서 유미리는 1992년에 최연소로 기시다 쿠니오 희곡상을 수상한다. 1994년에는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石に泳ぐ魚]』를 발표해 본격적인 소설가로 데뷔하게 된다. 또 『풀 하우스[フルハウス]』라는 작품으로 이즈미 교카 문학상[泉鏡花文学賞]·노마 문예 신인상[野間文芸新人賞]을 수상한다. 그리고 『가족시네마[家族シネマ]』로 1996년 하반기에 아쿠다가와 상을 수상하는 등, 활약이 두드러졌고 한국에서도 커다란 주목을 이끌었다. 또 현월도 『그늘의 집[蔭の棲みか]』으로 1999년 하반기에 아쿠다가와 상을 수상하고 관심을 모았다. 세대는 다르지만 1884년 『택시 드라이버 일지[タクシードライバー日誌]』로 주목을 받은 양석일은 1889년 『족보의 끝[族譜の果て]』, 1996년 『피와 뼈[血と骨]』 등으로 장대하고 굉장한 가족사[재일 한인의 역사] 작품을 발표했다. 시인 종추월, 가인 이 마사코, 평론가 강수차 등이 이 시기 같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임전혜는 오랜 세월의 연구 결과를 1944년 박사 논문인 「일본에 있어서의 조선인 문학사-1945년부터[日本における朝鮮人の文学の歴史―1945年まで]」로 발표하였다. 재일 조선인 사회 혹은 그것을 파악하는 시선이 점점 변하고, 재일 조선인 문학도 세대를 거듭함에 따라서 다원화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는 재일, 자이니치라는 말이 더이상 개인적으로 중요한 주체성에만 한정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영역으로 확대되어 변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1990년대 이후 이러한 현상은 더욱 현저해졌다.
일본어로 표기된 재일 조선인 문학은 자민족의 언어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한국 문학에 넣을 것인지, 일본 문학에 넣을 것인지 하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민족과 문학, 언어와 문학을 둘러싼 많은 문제가 재일 문학에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45년 이후로 일본어로 된 한국인 작가의 작품은 ‘조선 민족 문학인 동시에 일본 문학의 하나[朝鮮民族の文学であると同時にまた日本文学の1つ]’로 여겨지면서 넓은 시점에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재일 한인의 독특한 실존적 위치성, 이방인 의식, 배타적 현실주의, 조국과의 거리감, 민족적 정체성 등이 어떻게 표상되고 있는지 재일 디아스포라 문학을 중심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문화 시대 상황 속에서 새로운 평가가 지속적으로 제안되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