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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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일본에서 살아온 재일 한인 백 년의 역사를 해학적으로 조명한 연극을 통해 본 재일 한인의 삶과 애환 이야기.
「백 년, 바람의 동료들[百年, 風の仲間たち]」은 재일 한인 가수이자 작가인 조박(趙博)이 극본을 쓰고 일본 극단 신주쿠 양산박을 이끄는 김수진(金守珍)이 연출한 작품이다. 연출가 김수진 자신이 일본인과 한국인의 경계인으로 살아온 자전적 고민을 진솔하게 담아낸 작품으로 재일 한인들의 삶의 애환과 정체성 고민 등을 웃음과 눈물로 버무린 무대로 그리고 있다.
「백 년, 바람의 동료들」은 2011년 두산아트센터의 ‘경계인 시리즈’ 가운데 하나의 작품이다. 우리 사회의 경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자 ‘경계인’을 테마로 기획 제작된 작품으로, 자이니치라는 경계인으로 살아온 김수진 연출가의 경험을 다룬 작품이기도 하다. 2011년 성공적으로 첫 공연을 이루었고, 이후 2012년 일본 도쿄 및 오사카 순회공연도 이어졌다. 2011년 3월에 열렸던 두산아트센터 경계인 시리즈 제작 발표회에서 연출을 맡은 김수진은 “조박의 노래 「백년절(百年節)」을 듣고 연극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백년절」은 한국의 트로트와 비슷한 리듬으로 이쪽과 저쪽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계에 있는 재일 한인의 모습을 재미있게 노래한 것이다.”라며 연극을 제작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다. 연극은 진돈야[チンドン屋: 요란한 복장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손님을 불러 모으는 악단으로 주로 가게의 선전, 광고를 하는 역할]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연극의 공간적 배경은 오사카[大阪] 코리아 타운에 있는 거리의 술집 ‘바람 따라 사람 따라[風まかせ人まかせ]’이다. ‘바람 따라 사람 따라’는 오사카 다마쓰쿠리[玉造]에 실재하는 가게 이름이며 연출가 김수진의 단골집이라고 한다.
‘바람 따라 사람 따라’가 위치한 곳의 정식 명칭은 이쿠노 코리아 타운[生野コリアタウン]이다. 1993년부터 사용된 명칭으로 오사카 코리아 타운, 이카이노 코리아 타운, 모모다니 코리아 타운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전에는 조센이치바[朝鮮市場]라고 불리었다. 이쿠노 코리아 타운 인근 지역의 옛 지명은 ‘이카이노[猪飼野]’다.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카이노라는 지명은 조정에 헌상하는 ‘돼지를 키우는 사람들의 주거지’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백제 때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한반도와 인연이 깊은 지역이라고 하겠다. 일제 강점기인 1923년에 제주도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직항선이 개통되면서 제주도 주민이 일자리를 찾아서 오사카로 많이 건너왔고 당시 이카이노 부근이 공업화되면서 일손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곳에 모여 살게 되면서 자연스레 한인촌이 형성되었다. 그런 이유로 이곳 한인 중 80%는 제주도를 뿌리로 한 이들이라고 한다. 1973년 오사카시의 행정 구역 개편 때 돼지를 키운다는 의미의 지명이 재일 한인을 천시하는 경향을 부추길 수 있다는 생각에 이카이노는 7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인근 동네인 모모다니[桃谷], 쓰루하시[鶴橋] 등에 편입되었고 이카이노라는 지명은 사라졌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 살고 있는 재일 한인들 중에는 이카이노라는 지명에 자긍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아서 지명이 사라진 지 4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이카이노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이가 적지 않다고 한다. 연극 「백 년 바람의 동료들」에서도 극중 인물들은 자신들을 ‘이카이노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애착을 보이고 있었다.
연극 「백 년 바람의 동료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2010년 8월 29일 ‘바람 따라 사람 따라’ 개업 20주년이자 한일 강제 합병 100주년을 맞아 단골 가수 김영태[조박]가 단골손님들 앞에서 「백년절」이라는 신곡을 공개할 예정이다. 영태가 「백년절」 가사의 마무리를 하고 있는 동안 이카이노에서 태어나고 자란 단골손님들은 옛 추억을 이야기하며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다가 민족과 국적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면서 서로의 내면에 쌓여 있던 슬픔과 울분을 토해 낸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일본인이 아니라 조센진으로 불려야 했고 선조의 나라인 한반도에서는 쪽발이라 불려야 했던 재일 한인들은 늘 경계인으로 살아온 애환을 말한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계에서 살아야 하는 재일 한인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GO」, 「박치기」 등을 통하여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바 있다. ‘바람 따라 사람 따라’에 모인 이들은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붙잡고 살아왔던 인생살이를 돌아가며 이야기한다.
‘바람 따라 사람 따라’의 주인 아재는 만경봉호를 타고 북송된 뒤 생이별한 가족을 그리워한다. 자신과 병약한 여동생을 제외한 온가족이 북한행 귀국선에 올랐으나 후에 숙부로부터 받은 편지를 통하여 지상 낙원이란 선전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이 공연은 술집이 배경인 만큼 무대 위에는 늘 여러 명의 배우들로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연출되지만 아재가 막걸리를 담그며 과거를 회상하는 이 장면만큼은 무대 위엔 아재 혼자뿐이다. 그만큼 비중이 있는 장면이라 하겠다. 아재의 독백 이외의 대부분의 장면은 일본어 대사로 진행이 되었지만 작품 속에는 「희망가」, 「아침이슬」,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등 한국 가요가 다수 삽입되었다. 이들 가요는 배우들이 한국어로 직접 불렀다. 연출가이자 연기자로도 출연했던 김수진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장면에선 늘 눈물이 난다고 하였다.
아재의 회상 장면에선 북한을 비난하고 있으나 한국에 대한 비판도 있다. 작품에서 동희는 한국을 알고 싶어서 유학을 다녀온 인물로 등장하는데 동희는 군사 독재에 항거하는 대학생들의 데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현재도 걸핏하면 코피를 쏟는 등 몸 상태가 좋지 않다. 한국 민주화 운동에 동참한다는 자부심이 “한국말도 못하는 반쪽발이”라는 말에 무참히 짓밟힌 사연도 토로된다. 또한 ‘제주인의 제2의 고향’이라고 불릴 정도로 제주를 뿌리로 하는 한인이 많은 이카이노에서는 4·3 사건으로 너무도 많은 친인척을 잃어 집집마다 1년에 10여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눈물 나는 사연이 소개된다. 경계인으로서의 애환과 소속감을 찾으려 좌충우돌하던 그들이 내린 결론은 “내셔널리즘도 싫어, 코스모폴리터니즘도 싫어. 민족적 편견 섞인 조센징도 싫지만 버터 냄새 나는 ‘자이니치 코리안’도 싫어. 그저 활기 넘치는 재일 간사이인[在日關西人]으로 살래.”이다. 그들은 흑백 논리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그 순간 일본에 대한 불복종과 남북 모두에 대한 반항과 저항이라는 부정의 에너지가 ‘민족 국적 피부색 인종 다 상관없는 일본 빈민 공화국, 이카이노 만세’라는 긍정의 에너지로 폭발하는 것이다. ‘눈처럼 쌓이고 술처럼 빚어지는’ 한국적 한(恨)이 국적을 초월한 신바람으로 전환하는 순간이다. 단골손님들의 진솔한 이야기에 모두 웃고 우는 사이에 영태의 「백년절」은 완성된다.
흰 쌀밥이 먹고 싶어서 현해탄을 건너왔지만/ 소금과 푸성귀 보리밥뿐인 노가다, 광부, 부두 노동자/ 일거리 있으면 고마울 뿐 당장의 끼니조차 알 수 없어/ 황국 신민 말뿐이고 한 껍질 벗겨 보면 노예 천국/ 마침내 기다리던 새벽이 왔다는 그 기쁨도 잠시만/ 돌아가는 배조차 기약 없고 현해탄의 파도만 높네
백 년 지나면 강산이 변하네 나라가 망하면 사람도 죽네/ 대대손손 삼대가 살아왔건만 타향살이의 근심이여/ 백 년 지나면 강산이 변하네 고향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대대손손 삼대가 살아왔건만 내 고향 없다는 신념이여/ 백 년 지나면 강산이 변하네 대지는 갈라지고 끊겨 버리고/ 대대손손 삼대가 살아왔건만 조국을 갈망하는 허무함이여/백 년 지나면 강산이 변하네 사람의 마음도 변하지만/ 백 년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굽히지 않는 불복종
-「백년절」 가사 중에서-
「백년절」은 백 년이란 세월 동안 차별받으면서도 일본에 귀화하지 않는 70만 재일 한인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파고들고 있다. 한국 민요조 멜로디에 기초한 「백년절」에는 일본의 엔카와 한국의 트로트, 한국의 민중가요 「아침이슬」과 북한의 행진곡이 뒤섞여서 난장을 펼친다. 「백 년, 바람의 동료들」은 그 노래의 사연을 음악극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지던 이 기묘한 유행가 조합이 재일 한인의 신산한 삶을 풍자적으로 녹여 낸 가사의 힘으로 흥겹고도 신나는 댄스곡 메들리로 변모한다. 트로트와 엔카에 얽힌 가요사 비화에 대한 부분도 소개되는데 한국 트로트의 원형인 엔카가 식민지 조선의 민요를 채집하고 연구했던 일본인 작곡가들에 의해 탄생한 것으로, 트로트와 엔카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언급은 의미심장하다.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재일 한인의 애환을 그린 연극 「백 년 바람의 동료들」은 한국과 일본의 정서가 적절히 혼합된 작품으로 재일 한인의 정체성에 대하여 환기시키는 작품이다. 또한 연극이 끝날 때 영태의 노래 선율에 맞춰 전 출연진이 10여 분간 신명나는 노래와 춤사위를 펼치며 재일 한인들의 슬픔도 웃음으로 승화시키며 한을 씻어 낸다. 연극은 시작과 마찬가지로 엔딩 장면에도 신명나는 연주로 자칫 무거운 소재의 재일 한인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고 유쾌하게 연출하였다.
이와 같이 재일 한인 백 년 역사와 치열했던 삶을 진솔하게 그려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백 년, 바람의 동료들」은 일본 배우 및 재일 한인 배우들의 일본어 공연으로 진행된다. 배우들의 강렬한 몸짓 등 일본의 언더그라운드 연극적 형식을 지칭하는 텐트극장 형태를 소극장 무대로 옮긴 것이다.
「백 년, 바람의 동료들」을 쓴 작가이자 연기자인 조박은 음반 「백년절」, 「소리마당」 등을 내기도 한 가수이며 영화 연극에도 다수 출연한 바 있다. 조박은 「백 년, 바람의 동료들」에 대하여 “경계에 사는 ‘경계인’이야말로 동서남북, 좌우상하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백 년, 바람의 동료들」은 재일(在日)이라는 정체성을 넘어 ‘사람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라고 말하였다.
한편, 연출자 김수진은 극단 신주쿠 양산박의 대표로 유명하다. 신주쿠 양산박은 일명 텐트 극장으로 일본 앙그라[소극장] 연극을 계승하며 실험적인 무대 등을 선보이며 한국에서도 열렬한 팬을 형성하고 있는 일본 극단이다. 독특한 표현 스타일과 스펙터클한 무대로 세계적으로 입지를 확보하고 있다. 1987년 일본 연극계가 점점 잃어 가던 이야기[로망스]의 복권을 목표로 창단되었으며, 명쾌하고 독특한 연출력을 선보이며 다수의 화제작을 발표하였다. 1989년부터 시작된 해외 공연의 일환으로 「천 년의 고독」을 한국에서 선보였으며, 「천 년의 고독」의 국내외 연속 공연의 성과를 인정받아 일본 연극 잡지 『테아트르』가 주최하는 제17회 테아트르 연극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인어 전설」의 일본 각지 강 주변을 이용한 공연이 화제가 되었으며, 「인어 전설」로 1991년 독일 국제연극제, 1992년 중국, 1993년 한국 등의 해외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김수진은 「백 년, 바람의 동료들」에 대하여 “조박 작가와의 공동 작업은 재일 교포 연극 문화를 활성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라며 “연극 「백 년 바람의 동료들」은 재일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넘어 보편적인 인간의 주제에 육박한 드문 작품으로, 이 작품이 한국에서 극단의 레퍼토리 작품으로 사랑받길 기대하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연극 「백 년, 바람의 동료들」의 출연진은 조박, 김수진, 미우라 신코[三浦伸子], 히로시마 코[広島光], 와타라이 구미코[渡会久美子], 야시로 사다하루[八代定治], 신 다이키[申大樹], 미즈시마 간나[水嶋カンナ], 고바야시 요시나오[小林由尚], 에비네 히사요[海老根寿代], 소메노 히로타카[染野弘孝], 아리스가와 소와레[有栖川ソワレ], 덴다 게이나[傳田圭菜], 가토 료스케[加藤亮介], 사토 마사유키[佐藤正行], 아라타 쇼코[荒田翔子], 시미즈 슈헤이[清水修平] 등이다.
한국에서는 두산아트센터의 경계인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으로 2011년 6월 7일부터 7월 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공연되었으며, 2013년에는 3월 6일부터 1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2016년에도 3월 23일부터 25일까지 왕십리역 광장 특설 무대에서 공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