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역사/근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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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현대 재일 한인 사회의 대표적인 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갈등과 화합의 활동.
재일 한인 사회에는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약칭 민단]과 북한을 지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약칭 총련] 두 단체가 있다. 조국의 남북 분단과 이념 대립의 연장선에서 두 단체는 재일 한국인, 재일 조선인 사회에서도 갈등과 대립을 계속하고 있다.
1955년 5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북한의 재외 공민 단체를 표방하고 결성된 이후 ‘반공’을 기치로 내걸고 있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 조직적으로 대립해 왔다. 특히 1959년부터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주도하여 ‘북송사업’을 전개하자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북송사업을 반대하는 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1959년 2월 13일 일본 정부가 재일 조선인의 북한 귀국을 지원하기로 발표하면서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조직적인 투쟁은 시작되었다. 1959년 2월 25일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중앙민중대회를 열고 일본 전국애서 95,000명이 참가한 가운데 북송 반대 항의문과 진정서를 일본 당국에 보냈고 선전대는 비행기로 북송 반대 전단지를 일본 관동 지역 일대에 산포했다. 1959년 8월 15일에는 니가타현에서 ‘북송 반대 민중 궐기 대회’를 개최했고, 9월 21일에는 도쿄 시바 공원에서 ‘북송 반대 무기한 단식 투쟁’을 전개했다.
남북한의 해빙 무드에 영향을 받아 재일 한국인, 재일 조선인 단체는 2006년 일시적인 화합 움직임을 보였다. 2006년 2월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 본부는 제49회 전체 대회를 열어 하병옥(河丙鈺)을 단장으로 선출했다. 하병옥 단장은 1935년 9월에 경상남도 진양군[현재 진주시]에서 태어났다. 하병옥은 1967년에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도쿄 도시마[豊島]지부의 집행 위원을 역임한 이래 줄곧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조직 활동에 관여해 왔다.
하병옥은 단장에 입후보하면서 다음 6가지 공약을 내걸었다. 첫째, 조직의 개혁 강화와 자립 운영을 통해 생산성 있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을 만들고 동포 젊은이들이 대거 참여할 수 있도록 선거 제도를 개혁하겠다. 둘째, 재일 한인의 화해와 화합을 통하여 권익 신장에 진력하겠다. 셋째, 지방 참정권 획득을 위해 특별 위원회를 조직하고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겠다. 넷째, 노인 복지 시설 등 동포 노인들의 복지 개호 사업을 중점적인 사업으로 추진하겠다. 다섯째, 민족 교육을 발전시켜 독자적인 재일 한인 문화를 발전시켜 가겠다. 여섯째, 한일 우호 친선을 더욱 강화시켜 나가겠다.
하영옥과 함께 단장 경선에 입후보했던 정진(鄭進)과 공약에서 큰 차이를 보인 것은 두 번째 ‘재일 한인의 화합’ 공약으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의 화합을 겨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영옥은 당선 직후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도 동포의 화합을 강조했으며,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나 뉴커머 동포들과도 대동단결을 꾀하겠다는 의욕을 나타내었다.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만난 직후,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중앙 조직 사이에도 일시적으로 화합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그 후 큰 진전이 없었다.
2006년 3월 9일 하병옥 단장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 본부에서 기자 회견을 통해 상임 위원 인사 조치 결과를 발표하면서 ‘개혁 민단의 스타트에 임하여’라고 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담화문 가운데 ‘재일 한인의 화합’ 공약 사항을 구체화하여 ‘재일의 통일 모델’이라고 이름 붙인 구상을 통해 하병옥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비롯하여 이념을 달리하는 모든 단체와 대화와 화해를 추구하며 화합 태세를 구축하겠다고 하는 의지를 천명했다. 하병옥은 재일 한인 사회에 존재하는 38선 장벽을 없애고 재일 한인들이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밝은 미래도 구축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재일 한인은 하나’라고 하는 이념 아래, 될 수 있는 한 빨리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방문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윽고 5월 17일 오전 하병옥 단장은 7명의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임원을 대동하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중앙 본부를 방문하여 서만술(徐萬述) 의장을 만났다. 이로써 양 기관이 결성된 이래 처음으로 대표자 간 회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6·15 공동 선언이 발표된 지 5년만의 일이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대북 포용 정책과 함께 남북한 화해의 움직임이 급진전되는 가운데에서도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중앙 조직 사이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단체장 회합을 통하여 양 단체는 민족 화합을 향한 ‘본국’ 정부의 의향을 수용하는 자세를 보였다. 양 단체장은 회담 후 발표한 공동 성명에서 양 단체는 화해와 화합을 이룩하고 재일 한인의 민족적 단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 움직임은 곧바로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내홍을 낳게 되었다. 한 달이 조금 지난 6월 24일에 열린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임시 중앙 위원회는 ‘5·17 공동 성명’의 백지화를 결정했다. 새로운 중앙 집행부의 조직 운영 방식과 인선에 대해 반감을 품은 조직원들이 민주적 합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의 공동 성명을 비판하면서 조직 내부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구체적으로 공동 행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순탄한 흐름을 보일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6·15 공동 성명’ 이후에 남북한에서 추진되고 있는 공동 사업들이 어려움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부터 쉽게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의 공동 사업을 위한 대화도 추진하기 전에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내부로부터 ‘5·17 공동 성명’의 백지화를 공공연히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광주에서 열린 6·15 기념행사에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공동 성명에서 발표한 합의 사항을 이행하지 않았으며,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 공동으로 열기로 한 2006년 8·15 기념행사도 무산되었다.
하병옥 단장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조직의 내분을 수습하기 위해 6월 24일 임시 중앙 위원회를 소집했다. 하병옥 단장은 이 자리에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방문과 공동 성명 발표를 비밀리에 추진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비밀 교섭의 책임을 물어 부단장 5명의 사표를 수리하고 기획실장과 평화 통일 위원장을 해임하도록 하겠다고 하는 의향을 밝혔다. 그리고 ‘5·17 공동 성명’의 성격에 대해 추궁하는 위원에게는 “이제는 백지화 상태와 같은 것”이라는 애매한 답변을 내놓았다. 단장에 입후보하면서 내세웠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의 화해’라는 강렬한 슬로건에 비해 무책임하고 나약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위원회 회의 종료에 앞서 김광승(金廣昇) 의장은 “5·17 공동 성명이 백지 철회되었다.”라고 선언했다. 현 집행부 체제에 반발하는 일부 위원들은 하 단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정상화’를 위하여 임시 대회를 소집하자고 하는 서명 운동을 전개했다. 결국 9월 21일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임시 중앙 대회를 열어 새로운 단장으로 정진을 선출했다. 결국 ‘5·17 회합’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세련되지 못한 조직 행태를 드러낸 채 일과성 해프닝으로 끝났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 조직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의 화합을 과감하게 추진하지 못하는 배경에는 두 가지 큰 문제가 존재한다. 첫째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북한 정부로부터 자유롭지 않을뿐더러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고 있지도 않다는 점이다. 오늘날 북한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감이 극심한 상황에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는 북한의 납치 스파이 마약 등 온갖 불법 활동과 관련이 있는 단체로 인식되고 있다. 재일 한인의 권익을 우선시해야 하는 조직으로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는 적어도 북한 정권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자세를 보여야만 한다. 둘째는, 일본 당국과 일본 사회로부터의 직간접적인 압박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미사일 발사, 핵 개발, ‘납치’ 문제 등으로 북일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조직적으로 압박하고 있는 가운데, 자칫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까지 그 파급 효과가 미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