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역사/근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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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항 근처 하시마섬 |
일제 강점기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여 수탈한 현장인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나가사키현 하시마섬.
군함도에는 1917년부터 조선인 노동자가 유입되었고, 아시아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최대 800명 정도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었는데, 정확한 사망자 현황은 알 수 없다. 122명의 사망자 기록과 15명의 유해 봉환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군함도(軍艦島)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県] 노모반도[野母半島] 서쪽, 나가사키항에서 18㎞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섬 하시마[端島]의 다른 이름이다. 먼 곳에서 보면 마치 바다에 떠 있는 한 척의 군함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군함도는 처음부터 채탄을 위해 개발되었다. 원래 남북으로 약 320m, 동서로 약 120m 크기의 작은 섬이었지만 1897~1931년간 6차례에 걸쳐 매립, 확장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군함의 모습이 되었다. 하시마의 크기는 남북으로 약 480m, 동서로는 약 160m이다. 섬의 둘레는 약 1,200m, 총 면적은 6.3㏊[63,000㎡]이다. 하시마는 규슈[九州]의 세이히탄전[西彼炭田]에 있으며, 더 좁게는 다카시마탄전(高島炭田)에 속한다. 다카시마탄전의 광구(鑛區)는 대부분 해저에 있는데, 1937년 광구 면적은 약 802만 평[약 26㎢]이었다. 점점이 산재한 다카시마와 후타고시마[二子島], 나카노시마[中ノ島], 하시마를 발판삼아 채굴이 이루어졌다. 주요 탄층은 남북에서 서쪽 방향으로 경사졌다. 탄층의 각도는 다카시마 20°, 후타고시마 25°, 하시마 30~50° 정도로 하시마 경사가 가장 심하였다. 다카시마에서는 1700년대 초반에 석탄 채굴이 시작되었으나 하시마에서는 이보다 약 90년 늦은 1810년경에 처음으로 석탄이 발견되었다. 미쓰비시사[三菱社]는 1881년 다카시마를 매수하고 1890년 9월 11일 하시마를 매수한 후 해저 광구 251,000평[0.8㎢]을 취득해 탄광 개발에 착수하였다. 미쓰비시사는 1893년 미쓰비시 합자회사를 설립한 후 하시마탄광을 다카시마탄갱의 지갱(支坑)으로 관리하였다. 1918년 미쓰비시[합]는 광산부(鑛山部)와 탄광 사업 일체를 묶어 미쓰비시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한 후, 하시마의 제2수직갱[199m]과 제3수직갱[480m]에서 조업을 시작하였고, 1919년 제4수직갱[354m] 개시에 착수해 1919년 5월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연 20만 톤대의 석탄을 산출하였고, 1941년 41만 1100톤으로 늘었다.
하시마에 본격적으로 노동력이 유입된 것은 1910년대 이후이다. 임금을 기대한 일본 하층민과 범법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개발 초기부터 노동 환경이 열악하기로 악명 높아 일본 사회에서 감옥섬 또는 지옥섬으로 불렸다. 노동자들은 선착장에서 섬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걸린 팻말 영광의 문을 지옥의 문이라 불렀다. 하시마탄광은 개발 초기부터 노동자 인신 구속과 착취가 심하였던 곳이었고, 아시아 태평양 전쟁 본격화 이후에는 강제 동원된 조선인과 중국인, 연합군 포로에 대한 가혹 행위가 심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인 노동자가 하시마에 처음 들어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미쓰비시광업은 다카시마탄전에 개발된 해저 광구를 다카시마탄갱 또는 다카시마광업소로 묶어서 관리하였다. 따라서 노동자 수에 대한 통계 자료는 다카시마라는 이름 아래 각 섬들에 흩어진 개별 탄광이 모두 포함된 경우가 많으므로 하시마 단독 통계 자료는 찾기 어렵다. 하시마를 포함한 다카시마탄갱에 조선인 노동자의 존재는 1917년부터 확인된다. 1917년 말경 150명의 조선인이 다카시마탄갱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는 기록과 안도옹공덕사은비[安藤翁公德謝恩碑] 비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미쓰비시는 일본 각지에서 모집을 진행하였고, 1917년 9월 21일 조선인 모집도 허가받았다. 1917년 미쓰비시의 다카시마탄갱에 조선인 노동자 이입이 시작된 후 1년이 채 되지 않아 2배 이상 늘어났다. 1918년 5월 말 다카시마탄갱의 전체 노동자는 3,336명이었는데, 이들 중 조선인 노동자는 334명이었다. 이 자료에는 다카시마탄갱 각 섬의 노동자 수가 따로 집계되어 있는데, 하시마의 갱 내부 941명 가운데 조선인은 70명이었다.
1935년 3월 26일 하시마탄광에서는 갱내 가스 폭발로 20명 이상의 갱부가 사망한 큰 사고가 일어났다. 출신지가 공개된 사망자 17명 중 조선인 갱부는 절반 이상인 9명이다. 1935년 6월 하시마의 조선인 갱부 350명이 친목회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1935년 350명 이상의 조선인이 하시마에서 탄광 산업에 종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미쓰비시가 회사 차원에서 조선에 노동자 모집인을 두고 탄광 노동자 모집을 계속 진행한 결과였다. 이러한 기업 차원의 노동자 모집 방식은 1937년 중일 전쟁을 계기로 큰 변화를 맞는다. 노동자는 노무자로 전환되었다. 일본은 1937년 중일 전쟁 발발을 기점으로 총동원 체제를 가동하고 1938년 4월 공포한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해 인적·물적 자원과 자금을 동원하였다. 전쟁 수행을 위해 부족한 노동력을 조선에서 공급하고자 하였다. 1937년 말 일반 도일 조선인 노동자를 탄광 노동력으로 동원할 방침을 세운 데 이어 1939년 7월 중점적 5대 산업을 대상으로 8만 5000명의 이입 조선인 노무자를 할당하였다. 이후 일본은 1945년 패전에 이르기까지 국가 권력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민중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였다. 동원 과정은 첫째, 일본 기업이 필요한 노무자 수를 일본 후생성에 신청하면, 후생성은 조선 총독부와 인원 조정을 거쳐 인원을 할당하고 고용 허가를 내주었다. 둘째, 허가를 받은 기업이 다시 조선 총독부에 모집 허가를 신청해 지정된 지역에서 할당된 인원수를 모집한 후 관의 통제 아래 집단적으로 송출하였다. 미쓰비시 다카시마탄갱은 1937년 550명, 1941년에는 785명의 조선인 노무자 모집을 일본 당국에 신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시마탄갱노동조합 기록에 의하면 하시마탄광의 광원(鑛員) 수는 1940년 이후 꾸준히 증가하였다. 1943년부터 1945년간 하시마에는 500~800명 정도의 조선인 노무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시마탄광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열악한 작업 환경과 가혹한 상황을 경험하였다. 하시마는 해저 탄광일 뿐만 아니라 누운 채 탄을 캐야 하는 사갱(斜坑)이었다.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정도의 작은 갱구를 600~1,000m까지 기어 들어가 물에 젖은 상태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채탄하였다. 바닷가에 위치한 조선인 숙소에는 바닷물이 늘 들이닥쳤고, 파도에 휩쓸리기도 하였다. 1941년 12월 미국 참전 후 일본 당국은 전쟁 수행을 위한 출탄량 증산을 독려하였다. 하시마는 1941년 4월부터 9월까지 진행한 후쿠오카 감독국의 출탄 경쟁에서 1위를 하였으며 1942년 8월부터 10월까지 개근(皆勤) 운동도 실시하였다. 그러나 1941년을 정점으로 출탄량은 저하되었다. 1945년 7월 말에는 공습으로 다카시마광업소의 발전소와 시설이 큰 타격을 입자 해저 케이블을 통해 다카시마에서 전기를 공급받던 하시마도 전기가 끊어져 채탄을 중단하기도 하였다. 해저 탄광은 전기 발동기가 없으면 가스 폭발 사고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탄량 증산 독려는 가중되었다. 또한 강제 동원되어 탄광에 투입된 조선인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으로 탄광 노동에 익숙치 않았으나 하루 이틀 간단한 교육을 받고 갱내 노동에 투입되었다.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조선인들의 현장 투입은 재해 위험을 높이는 요인이었다. 석탄 증산을 강요하는 강도 높은 작업과 열악한 식량 사정, 일상적인 폭력을 견디기 어려웠던 조선인들은 탈출을 시도하였다. 석탄 상자나 사과상자 파편을 잡고 건너편 노모반도를 향해 헤엄쳐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탈출 성공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대부분 거친 풍랑에 익사하거나 간신히 바다를 건넌다 해도 다카시마 땅을 밟는 순간 맞닥트린 무서운 폭력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하시마와 마주한 노모자키정[野母崎町] 난고리[南古里]에 있는 남난고 해난자무연불지비[南越名海難者無緣佛之碑] 주변에 익사한 유체를 매장하였는데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長崎在日朝鮮人の人權を守る会]는 하시마에서 탈출하다가 익사한 조선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탈출을 막기 위해 재향군인회원이 총을 들고 경비를 서기도 하였으나 탈출 시도는 그치지 않았다. 당국의 사정에 따라 인력 재배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943년 여름 하시마의 조선인 노무자 350명을 중국인 포로 350명과 교환해 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로 배치하였다. 조선소에서 미군 포로와 쇳덩어리를 나르는 일을 2인 1조로 하였는데, 칼을 찬 헌병이 감시하였다고 했다. 1944년 8월 사할린에서 조선인들을 데려와 하시마에 배치하였다. 1945년 8월 나가사키시 원자 폭탄 투하 당시 폭심지에서 4㎞ 반경 내에 있던 나가사키조선소는 원자 폭탄 피해를 입었고, 하시마에서 배치되었던 조선인들 가운데에도 피폭자가 발생하였다. 또한 원자 폭탄 투하 후 당국은 하시마탄광의 조선인들을 나가사키 시내 복구 작업에 투입해 잔류 방사능에 노출시키는 피해를 입혔다.
하시마탄광의 조선인 노무자의 대부분은 갱내에서 주로 위험한 채탄 현장에 투입되었다. 생활환경은 매우 열악하였으며 전쟁 말기로 갈수록 식량 배급도 줄어들었다. 조선인들의 합숙소였던 요시다[吉田] 함바의 경우에는 배급되는 식량의 절반을 간부가 가로채기도 하였다. 갱내의 격한 노동으로 체력이 소모된 조선인들에게 주어지는 식사량은 매우 적었고, 영양도 열악해 밥의 20%는 현미, 80%는 콩깻묵이었다. 하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구타와 함께 밥을 주지 않았다거나 병으로 입갱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하루 한 끼만 주었다는 생존자의 구술이 있다. 이러한 환경은 조선인들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쳤고 질병 또는 사망으로 이어졌다.
하시마에 동원된 조선인은 다양한 이유로 사망하였으나, 사망한 전체 조선인의 수는 파악할 수 없다. 공개된 자료 2종류에서 122명을 확인하였을 뿐이다. 1980년대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가 공개한 첫 번째 자료는 화장(火葬)기록이다. 화장 기록은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이 「화장인허증 및 변재보고서[火葬認許証及び変災報告書[長崎]」라는 이름으로 재생산하였고, 한국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서 분석보고서를 발표하였다. 분석보고서에서는 하시마에서 1925년에서 1945년 사이에 사망한 136명의 조선인·중국인의 화장 관련 문서 150건과 니시소노기군[西彼杵郡] 사키토정[崎戸町] 사망 조선인 211명의 매화장인허증교부부(埋火葬認許証交付簿)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하시마 조선인 사망자는 120명이다. 화장 기록 외에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가 확인한 2명을 포함하면 확인된 하시마 사망 조선인은 122명이다. 122명 가운데 탄광 노무자는 1939년 이후 사망한 17세 이상 사망자 49명으로 추정된다. 사망자 122명 기록을 분석한 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1939년 이후 사망한 17세 이상 사망자 49명의 사망 시기는 1939년[6명], 1940년[5명], 1941년[3명], 1942년[3명], 1943년[8명], 1944년[11명], 1945년[13명]이다. 1943년 이후 사망자 수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강제 동원되어 하시마로 들어온 조선인 수의 증가, 탄광 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인의 갱내부 비율 증가, 강도 높은 노동과 과도한 할당 체제로 인한 장시간 노동 강요, 조선인이 가장 열악한 채탄 현장에 투입되었던 점 등이 배경이었다. 사망 원인은 병사, 외상, 변사, 탄광 사고, 기타이다. 외상, 변사, 탄광 사고는 공상(公傷)에 해당한다. 그러나 병사에서 호흡기 질환의 비율이 매우 높다는 점을 볼 때, 탄광 노동의 후유증으로 판단된다. 기타는 공습으로 인한 피해나 익사, 심장마비 등이었다.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15명의 유해 봉환을 확인하였다. 그 외 사망자 유해는 확인할 수 없다. 유골도 기록도 없는 무연고(無緣故) 유골이 되어 일본 땅 어딘 가에 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는 다카시마로 옮긴 조선인 유골 처리 과정을 추적한 결과, 미쓰비시광업이 탄광의 문을 닫으며 무연고 유골을 무성의하게 처리하였다고 확인하였다. 전시 중 미쓰비시는 사망자를 하시마 바로 인근 나카노시마에서 화장해 유골은 하시마로 가져온 후, 미봉환 유골은 하시마섬 내 사찰 센부쿠지[泉福寺]에 안치하였다. 미봉환 유골은 일본 패전 후 센부쿠지에 남아 있다가 1974년 하시마탄광 폐광과 함께 다카시마 납골 시설 센닌즈카[千人塚, 콘크리트제 반지하 납골당]로 옮겼다. 나가사키 지역 방송사인 NBC가 폐광 당시 모습을 촬영해 제작한 프로그램 「군함도가 가라앉는 날[軍艦島が沈む日]」 영상에는 하시마에서 옮겨온 유골을 안치하며 유골함에 붙어 있던 위패를 불태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조선인의 이름이 있었다. 미쓰비시는 위패 소각하면서 주인을 알 수 없는 무연고 유골을 만들었다. 더구나 미쓰비시광업은 다카시마탄광도 폐광하게 되자, 1988년 다카시마에서 완전히 철수하면서 납골 시설을 모두 파괴하고 센닌즈카 지하에 있던 100여 개의 유골 단지[하시마에서 옮겨 온 유골과 종래 다카시마탄광 관계자의 유골] 안의 유골 일부를 제멋대로 분골해 작은 항아리에 합골 후 영구 공양(供養)을 구실로 인근 사찰 긴쇼지[金松寺]에 옮기는 무성의한 처리를 보였다. 남은 유골은 센닌즈카 지하에 그대로 남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행방을 알 수 없다. 센닌즈카 안치 당시 유골 명부는 찾을 수 없으며, 긴쇼지에 보관된 106개의 작은 유골함에는 10여 명의 일본인 이름이 적혀 있을 뿐이다.
일본 패전 후 미쓰비시는 설비를 복구해 석탄 생산을 계속하였으나 1955년 이후 전성기는 다시 오지 않았다. 1974년 1월 15일 탄광을 폐광(閉鑛)하고 하시마는 무인도가 되었다. 미쓰비시가 2001년 다카시마정[高島町]에 무상양도한 후 2005년 시정촌합병(市町村合倂)에 따라 나가사키시로 이관되었다. 나가사키시는 폐허가 된 섬 내부에서 건물 붕괴가 진행되고 위험한 장소가 늘어나자 일반의 출입을 금지하다가 2008년 하시마 남쪽을 정비해 견학로를 조성한 후, 견학로에 한해 2009년 4월부터 관광객의 섬 상륙을 허용하였고, 일본의 대표적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하시마는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 산업 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토 구니[佐藤地] 주 유네스코 대사는 “there were a large number of Koreans and others who were brought against their will and forced to work under the harsh conditions[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되어 가혹한 조건 아래서 일하도록 강요당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있었다]”라는 공식 발언을 통해 일본 최초로 세계 공식 기구에서 강제성을 인정하였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권고 내용[강제 노동 역사를 기록할 것]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바로 정부 차원에서 합법적인 정책의 일환이었다며 강제성을 부정하였다. 권고 내용을 준수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고 있다. 오히려 하시마 석탄을 블랙 다이아몬드라 하며 산업화에 기여하였다는 긍정적 의미를 강조해 홍보하고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며 노동 실태를 왜곡하고 있다. 1991년 화장 기록에서 가족 이름을 발견한 한국 유족이 미쓰비시광업 후신인 미쓰비시머티리얼[Mitsubishi Material Corporation] 측에 유골 반환을 요청하고, 센닌즈카 아래 밀폐된 납골 시설 확인을 요구하였으나 미쓰비시는 지금 굳이 땅을 파는 것은 사자(死者)를 모독하는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글로벌 기업으로 알려진 미쓰비시의 민낯이자 군함도에 잠든 조선인의 실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