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역사/근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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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1923년 9월 일본 관동 일대에서 일어난 관동 대지진 당시 6,761명이 학살된 재일 조선인 대학살 사건 개관.
1923년 9월 1일 아침 도쿄 일대에서 규모 7.9의 강진이 발생하자, 혼란의 와중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 사회주의자 등이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당한 사건이다. 희생자 수는 6,671명[공식 기록]에서 23,058명[독일 외무성 자료]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20년대 전반 일본은 안팎으로 시대적 전환기에 직면하였다. 안으로는 경제 공황으로 노동 운동, 농민 운동, 부락 해방 운동이 사회의 저변을 뒤흔들었고, 밖으로는 코민테른의 활동이 동아시아에 미쳐 식민지 조선과 중국의 민족 해방 운동이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일본의 군부와 국가주의자들은 ‘과격사회운동취체법’ 제정을 시도하고, 이들 운동에 대한 탄압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때 일어난 관동 대지진으로 민중이 공황 상태로 빠져 버리자, 일본 군부와 군국주의자들은 당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민중의 보수적 감정을 이용하였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에 일본 관동 지역의 1부(府), 6현(県)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 99,331명이 사망하였고, 전 가옥이 파괴된 가옥은 128,266호, 반파된 가옥은 126,233호, 소실된 가옥 수는 447,128호에 달하였다. 이처럼 주거지가 엉망으로 파괴되고 심한 바람 속에 연이어 발생하는 화재와 불덩이들이 날아다니는 황망한 분위기 속에서 거주할 곳과 먹을 것을 동시에 잃어버린 민중이 이성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생명 보존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더해가는 가운데 9월 1일 진재가 발생한 그날부터 조선인이 방화했다거나 우물에 독을 푼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져 나가, 민중의 불안한 심리를 더욱 압박했다.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인 1923년 9월 1일 오후 경시청(警視廳)은 정부에 출병을 요청함과 동시에 계엄령 선포를 준비하였다. 내무대신 미즈노[水野鍊太郎][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경시총감 아카이케[赤池濃][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등은 1일 밤 도쿄 시내를 일순하였다. 다음 날 도쿄와 가나가와현[神奈川縣]의 각 경찰서 및 경비대로 하여금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라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하는 한편 각 경찰서에 진상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폭동’의 전문(電文)을 준비해 2일 오후부터 3일 사이에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後藤文夫]의 명의로 전국의 지방 장관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타이완총독부에도 타전하였다. 전문 내용은 “동경 부근의 진재(震災)를 이용해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는 등 불령(不逞)[불평불만이 많아 멋대로 함]한 목적을 이루려고 하여, 현재 동경 시내에는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는 자가 있다. 동경에서는 이미 일부 계엄령을 실시하였으므로 각지에 있어서도 충분히 주밀한 시찰을 가하고, 조선인의 행동에 대하여는 엄밀한 단속을 가해 주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조선인 폭동’의 터무니없는 소문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가운데 2일 오후 6시 긴급 칙령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은 처음 도쿄부와 인접 군에 선포되었으나, 3일에는 가나가와현, 4일에는 사이타마현[埼玉縣]과 지바현[千葉縣]에도 확대되었다.
관동 대지진이 발생한 지 5일째 되는 날, 계엄사령부에 의해 ‘조선 문제에 관한 협정’이라는 것이 극비리에 결정되었다. 협정 내용은 ① 조선인의 폭행 또는 폭행하려고 한 사실을 적극 수사해 긍정적으로 처리할 것, ② 풍설을 철저히 조사해 이를 사실화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긍정하는 방향으로 노력할 것, ③ 해외에는 특히 적화(赤化) 일본인 및 적화 조선인이 배후에서 폭행을 선동한 사실이 있다고 선전하는 데 노력할 것 등을 지령해 조선인 폭동을 사실로 날조하는 데 광분하였다. 이에 따라 7일에는 두 번이나 유산된 과격사회운동취체법안을 부활시킨 치안유지령을 긴급 칙령으로 공포하고, 치안을 해치는 사항을 유포시키는 행위는 징역 10년의 중형에 처하게 하였다.
계엄령 아래에서 군대·경찰을 중심으로, 또한 조선인 폭동의 단속령에 의해 각지에 조직된 자경단(自警團)에 의해 6,000여 명의 조선인 및 일본인 사회주의자가 학살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산하의 『독립신문』 특파원이 조사 보고한 바에 의하면, 도쿄에서 752명, 가나가와현에서 1,052명, 사이타마현에서 239명, 지바현에서 293명 등 각지에서 6,661명이 피살되었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시체조차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학살이 가장 먼저 행해진 도쿄와 가나가와현에서는 군대와 경찰이 중심이 되어 행해졌고, 지바·사이타마현 등지에서는 민족 배외주의자 중심의 자경단에 의해 행해졌다. 이 자경단은 죽창·일본도·곤봉·철봉 등을 들고 도망치는 한국인들을 붙잡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심지어 경무서 내로 도망친 한국인들까지 쫓아 들어와 학살하였는데도 일본 관헌은 사실상 이를 방조하였다. 또한, 일본 정부는 10월 20일 학살 사건의 보도 금지를 해제하였으나 군대·관헌의 학살은 모두 은폐하고, 그 책임을 자경단으로 돌리는 데만 급급하였다. 그 뒤 일부 자경단원은 형식상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으나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모두 석방되었다.
일본변호사협회의 보고서는 확정 판결문 가운데 수집 가능했던 혼죠[本庄] 사건, 짐보하라[神保原] 사건, 요리이[寄居] 사건, 구마가야[熊谷] 사건, 가타야나기[片柳] 사건 확정 판결문을 통해,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 사실을 밝히고 있다. 혼죠 사건 판결문에서는 1923년 9월 4일 밤 흥분한 군중 3,000여 명이 사이타마현 혼죠마치에 소재한 혼죠 경찰서에서 보호하고 있던 조선인을 습격하여, 그 다음 날 오전까지 조선인 6~7명을 살해한 사실이 확인된다.
짐보하라 사건 판결문에서는 보호하고 있던 조선인을 트럭에 태워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주변 민중 약 천여 명이 마치 파리 떼처럼 모여들어 트럭이 통과하는 길목에서 준비하고 있다가 트럭 중 2대를 정지시켜 같은 날 밤중에 이르기까지 조선인에게 죽봉, 곤봉 등으로 폭행을 가하거나 구타하였고, 혹은 작은 칼로 찌르거나 한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요리이 사건의 판결문에서는 요리이의 100여 명의 민중이 요리이 주변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언제 “불령”해질지 모르므로 미리 방지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각자 곤봉 등 흉기를 지니고 기친야도[木賃宿]인 마시타야[真下屋]로 가서 조선인을 구타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구마가야 사건 판결문에는 소방대장으로부터 이송을 위탁받은 구마가야마치 민중이 이송 중, 조선인 5인을 도중의 구마가야사[熊谷寺] 경내 등에서 여러 사람이 협력하여 살해한 사실이 확인된다.
가타야나기 사건 판결문에서는 조선인 한 명이 다이지 소메야[大字染谷]로 피난 온 것을 발견하고 일본 민중이 수없이 창과 일본도로 찌르고 구타한 것이 확인하였다. 구타당한 조선인은 간신히 감자밭으로 도주하기는 했지만 또 다른 일본 민중에게 발견되어 일본도와 창에 여러 차례 찔려 절명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오미야마치[大宮町] 하기하라병원[萩原病院]에 수용되었지만 결국 사망하게 된 과정이 기재되어 있다.
관동 대지진 당시 학살된 재일 조선인을 위한 추모 행사는 1923년 10월 28일 도쿄 조조지[增上寺]에서 최초로 진행되었다. 이후 재일 한인 단체를 중심으로 꾸준히 추모 행사가 이어졌다. 특히 1925년 9월 20일에 열렸던 관동대진재조선인학살추도회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도쿄 조선노동동맹회, 일월회, 삼월회, 도쿄 조선무산자청년회, 흑우회, 여자흥학회, 고학생형설회, 노사공생회 등 11개 단체가 공동으로 개최하였다. 최근 들어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재일 한인 사회와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에 의한 추모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재일본한국YMCA, 도쿄 YMCA, 도쿄 성시화운동본부 등 재일본 기독교 단체들이 2009년 9월 1일 추모합동예배를 한 바 있다.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90주년을 맞아 요코아미쵸에 있는 관동 대진재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등 관련 시설에서 일한협회 도쿄 연합회,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등 10여개 단체의 다양한 추모 행사가 진행되었다. 특히 요코하마 구보야마 묘지 관동 대진재 조선인 위령비에서는 요코하마 시민 단체들이 해마다 추도회를 갖고 있다.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기억하기 위한 추모 시설도 해방 이후 건립되었다. 가장 먼서 건립된 추모 시설은 1947년 3월 1일 재일본조선인연맹 치바현본부에서 세운 치바현 후나바시 마고메영원[馬込靈園]에 있는 ‘관동 대진재 희생 동포 위령비(關東大震災犧牲同胞慰靈碑)’이다. 관동 대진재 희생 동포 위령비는 원래 치바현 후나바시시 혼마치[本町] 2정목(丁目) 816번지에 건립하였는데, 1963년 7월 19일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이외에 도쿄와 사이타마[岐玉], 치바 지역에 사이타마 가타야나기무라[片柳村] 강대홍 묘비, 요코아미쵸 공원 관동 대진재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관음사 관동 대진재 조선인 희생자 위령의 비, 호쇼지[宝生寺] 관동 대진재 한국인 위령비 등이 있다.
이외에도 재일 한인 오충공 감독은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다큐멘터리 「숨겨진 손톱」[1983], 「불하된 조선인」[1986]을 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