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인의 삶과 애환이 서린 오사카 쓰루하시국제시장과 ‘미유키모리 상점가’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정의

일본 오사카 쓰루하시에 있는 올드커머 재일 코리안의 최대 밀집 지역으로 한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이며 한류 붐을 형성하고 있는 시장.

개설

현재 이쿠노는 1972년 행정구 개편 이전까지 이카이노[猪飼野]로 불렀다. 이카이노는 메이지 시대 개척한 시타마치[상업 지역, 下町]이었으며, 중소기업과 영세 기업 등 작은 공장이 많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카이노와 가까운 곳에 오사카 포병 공창[大阪砲兵工廠]이라는 일본 최대의 국영 군수 공장이 있어, 이와 관련한 하청 공장이 주변에 많이 존재하였다. 이카이노 지역의 하청 공장은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고 일본 국내의 규슈와 오키나와는 물론 한반도에서 조선인 노동자를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이카이노 일대 재일조선인 집거지 형성

조선인의 일본으로 도항은 1910년부터 본격화 되었으나 오사카 이카이노로 이동이 본격화 된 것은 1923년 오사카와 제주도 간에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 정기 항로가 개설된 것이 계기이다. 이카이노에 도항해 온 조선인은 하청 공장과 히라노강[平野川] 개착공사[開削工事]에 종사하면서부터 정주가 시작되었고, 이 지역에 재일조선인 집주 지역이 형성되었다.

재일조선인의 삶이 담긴 조선시장에서 코리안타운으로

식생활은 어린시절부터 몸에 밴 것으로 가장 바꾸기 힘든 보수적인 습관이다. 일본과 조선의 식생활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등 큰 틀에서 보면 공통점이 많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한 차이점이 발견된다. 우선 가장 큰 차이점은 먹는 생선 종류가 다르고, 요리에 맛을 내는 법이 다르다. 생선 조림을 예를 들어보면 일본은 간장과 설탕으로 맛을 내지만 조선인은 마늘과 간장, 고추로 졸려서 맛을 낸다. 또 닭고기, 돼지고기 등 육류를 일본인에 비해 많이 먹는 편이다. 체재가 장기화되면서 조선의 식생활이 그리워지게 마련이며, 고향의 맛을 제공하는 식재료를 취급하 는 조선 가게가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이카이노 지역에 조선 시장이 탄생하였다. 1930년대 이카이노 조선 시장에는 약 200여 곳의 생필품을 파는 가게가 있었으며, 마른 명태와 고추는 물론 혼례품까지 판매하였다. 설과 추석 명절이 다가오면 각 지역에서 물품을 구입하러 오는 조선인들로 붐볐다고 한다. 조선 시장의 이러한 번화는 19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하나의 공간, 두 개의 조국

1945년 해방을 맞은 한국은 독립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반도에 남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목으로 38선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이러한 속에서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5년간의 신탁 통치가 결정되었다. 처음에는 전국에서 신탁 반대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지만 소련군이 주둔한 북쪽에서 신탁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한국은 반대파와 찬성파로 양분되었다. 1948년 유엔 소총회에서 선거가 실시되었고 1948년 5월 10일 남쪽에서 단독 선거가 실시되어 이승만 정권이 탄생하였다. 이어 북쪽에서도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 국내에서는 일본에 남은 재일 코리안의 지지를 받아 1945년 10월 15일에 재일조선인연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연맹 지도부에 불만을 지니고 있던 반공 입장을 밝힌 사람들에 의하여 1946년 10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이 결성되었다. 이처럼 각각 입장을 달리한 조직의 탄생으로 재일 코리안 사회는 두 개로 갈라지게 되었고, 이카이노 또한 북쪽을 지지하는 사람과 남쪽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갈라져, 마치 한반도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38선이 그어지면서 두 개의 공간이 생겨났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대립은 가족과 친척, 이웃간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도 재일 코리안의 세대 교체와 남북 정세의 변화 등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현재는 다문화공간으로 변모

1970년대까지 번화했던 조선 시장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재일 코리안의 세대 교체에 따라 제사와 명절의 간소화 되거나 모시지 않는 경향이 강해진 것과 국교 정상화로 본국과의 왕래가 가능해지면서 가정의례 준칙에 의한 의식의 간소화 정책 등의 외부적 요인도 함께 작용하였다. 의식의 간소화는 조선 시장에 그대로 반영되어 차츰차츰 쇠퇴되어 갔다. 또 1980년대 이후 생겨난 대형슈퍼 진출의 영향으로 일본 각지의 상가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침체된 조선 시장의 활성화를 위하여 코리아타운 구상이 제기되었다. 1993년 코리아타운 구상을 바탕으로 오사카시가 보조금을 지원하겠다는 정책에 따라 한국풍의 백제문이 건립되면서 이카이노 조선 시장은 코리아타운으로 재탄생되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와 2004년부터 불기 시작한 한류 붐의 영향으로 코리아타운은 명실공히 한국 문화와 정보를 발신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현재 이곳은 일본의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이문화 이해와 체험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재일 코리안 집주 지역에서 일본인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다문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쿠노 코리아타운과는 별개로 JR쓰루하시역 아래에는 국제 시장이 존재한다. 공습으로 공장 시설 등 생산 시설이 파괴됨에 따라 식량, 일상생활 필수품이 부족한 상황에서 공습으로 불탄 빈 공터에 암시장이 생겨났다. 현재 쓰루하시 국제 시장도 이때 생겨난 암시장이 현재 모습으로 변화된 것이다. 쓰루하시 지역은 뉴커머 재일 코리안의 비즈니스 공간으로 이쿠노 코리아타운과는 조금 다른 색채를 띤다.

참고문헌
  • 정희선 외, 『재일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형성: 이주와 정주를 중심으로)』(청암대학교 재일코리안연구소, 선인, 2013)
  • 손미경, 『문화플랫폼으로서 도쿄·오사카 코리아타운 연구』(한국외국어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3)
  • 孫ミギョン, 「大阪生野コリアタウンとソウルガリボン洞―二つのエスニックコミュニティの過去といまー」(『市政研究』186, 大阪市政調査会,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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