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속의 한국 코리안타운 도쿄 신오쿠보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일본 도쿄도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정의

일본 도쿄 뉴커머 한국인의 밀집 지역이자 상업 공간으로 형성된 코리안타운 지역.

개설

도쿄[東京] 오쿠보[大久保] 지역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에도[江戶] 막부에 입성한 직후 철포백인조(鐵砲百人組)로 불리는 무사를 이 지역에 정착시키면서부터, 타지에서 모여든 하급 무사 집단에 의해 형성된 하급 무사 주택지였다. 도로 양쪽에 장방형 부지들이 이어져 있었고 메이지 시기에는 부지의 경계선에 골목길을 만들었다. 오늘날 쇼쿠안에서 오쿠보에 이르는 거리에 미로처럼 좁은 골목이 무수히 많은 것은 이때의 흔적이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교통망의 발달에 따라 오쿠보는 교외 주택지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오쿠보는 교외에서 도심으로의 교통망이 발달하면서 동경하는 교외 생활을 할 수 있는 지역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메이지 시대부터 독일인 바이올리니스트 등 초기 일본 악단에 공헌한 외국인 음악가들이 오쿠보 지역에 거주하였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오쿠보는 1945년 4월부터 5월에 걸쳐 공습을 받았다. 공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오쿠보는 전후 부흥과 발전의 방향성으로 가부키쵸 건설에 착수하였다. 가부키쵸는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기와 맞물리면서 지방에서 대도시로 젊은 층의 유입이 본격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주로 폐품 회수 등 어려운 생활을 해온 재일 코리안 사회는 1964년 동경 올림픽 전까지 신주쿠역과 오쿠보역 선로 즉 야마노테선[山手線], 츄오센[中央線], 소부센[総武線]의 철교 아래 판잣집들을 지어 살면서 오쿠보 지역에 조선인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50년 재일 코리안 사업가 신격호가 오쿠보에 롯데 공장을 설립하였다. 롯데 공장이 조업을 시작하면서 고용을 기대한 한반도의 한국인과 재일 코리안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주택가였던 오쿠보는 1960년대 경부터 쓰레코미숙소[간이 여관, 러브 호텔]라고 불리는 여관과 호텔이 들어서면서 풍광이 변화되었다. 1980년대에는 아시아계 뉴커머의 집주 지역이 되었고, 1990년대에는 에스닉타운이 형성되었다.

뉴커머 한국인의 상업지역으로 변모

1970년대 후반부터는 가부키쵸 내 유흥업 종사자의 다국적화가 시작되었고, 1980년대부터는 한국 여성의 유흥업 종사자가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1980년대부터 이 지역에 일본어 학교와 전문학교가 많이 생겨나면서 외국인 유입은 더욱 증가되었다. 한국인 유학생과 취학생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이다. 1990년 일본의 출입국 관리 및 난민인정법 개정으로 입국이 수월해짐에 따라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단순 노동자의 입국이 급증하였고, 오쿠보는 에스닉타운으로 변모하였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쇼쿠안 도오리 부근에 ‘할렐루야 교회’와 음식점인 ‘무교동’과 ‘한국식당’ 등이 생기고, 가부키쵸[歌舞伎町]의 한국클럽이 증가하였다. 올드커머가 아닌 뉴커머 재일 코리안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1985년 쇼쿠안 도오리에 한국계 ‘도쿄 중앙교회’가 생기면서, 교회를 중심으로 신자들이 쇼쿠안 도오리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한국계 뉴커머가 본격적으로 급속하게 증가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이다. 오쿠보가 에스닉 타운으로 성격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버블 붕괴에 따른 산업 구조의 변화, 상점주의 고령화에 따른 폐업 등이 이어지면서, 빈 점포를 외국인이 임대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도쿄 오쿠보 지역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에스닉 타운화되어 갔다. 그러나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와 2004년 드라마 「겨울연가」를 계기로 일기 시작한 한류가 K-POP 열풍으로 이어지면서부터 오쿠보 지역에서 한인 상권이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이후 도쿄 오쿠보 지역은 코리아타운으로 이미지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동일본 대지진 이후 도쿄를 빠져나간 한국인을 대신하여 아시아계 이주민이 새롭게 유입되면서 오쿠보는 코리아타운에서 에스닉 타운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

누커머 한국인의 직종 변화

1990년대 전후 유학생 출신 등 한국인 뉴커머가 가부기쵸의 풍속업에서 일하는 여성에 대해 각종 서비스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식당을 비롯하여 식료품점, 국제 전화 대리점, 비디오 대여점, 이사 센터, 송금업 등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민족적 사업이 더욱 다양해져 기존 업종에 한국 식품, 사우나, 화장품, 법률 상담, 여행사, 의료 수선 등의 업종이 추가되었고 1997년 한국의 외환 위기를 계기로 일본에 간 한국인을 고객하는 직업 소개소가 새로 등장하여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약국, 재생 용품점, 건강식품, 사진 스튜디오 등의 업종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와 2004년 한류 붐을 시작으로 한류 상품점도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한국 화장품 가게도 함께 증가하였다.

도쿄 오쿠보 코리아타운은 한류 팬층의 소비 욕구를 자극하기 위한 상품들이 주로 판매되는 곳으로, 일본에서 가장 가까이 한국을 느끼고 소비하는 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새롭게 유입된 아시아계 외국인과 조선족의 진출, 혐한류와 한일 양국의 관계 악화로 한국인 상권의 많이 축소되었다.

오사카 이쿠노와는 달리 지역 주민과 커뮤니티 간의 연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 혐한류 시위 등의 위협적 요소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점은 앞으로 뉴커머 한국인이 더불어 공생하기 위해서는 일본인 지역 커뮤니티와의 협력 등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의인 이수현, 일본은 놀라게 하다

2001년 1월 26일 저녁 7시 15분,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 전철역에서 고(故) 이수현의 ‘이타적 살신’은 일본인에게 충격을 주었다. 남에게 무관심한 일본 사회에서 타인을 구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던진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일본에서는 이수현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꾸준이 이어져 오고 있다. 2004년 1월 16일에 도쿄에서 개최한 ‘한일 합동 3주기 추모제’에서 경제 평론가 다케우치 히로시[竹內宏]는 “이수현 청년은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이타적 희생을 몸으로 실천해 거대하면서도 공동화된 사회 도쿄, 옆집에 누가 사는지 흥미도 관심도 없고 항상 열쇠는 잠그고 다니며 자기와 친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친교가 없는 슬픈 일본 사회와 일본인을 반성하게 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일본 도쿄 JR야마노테선[山水線] 신오쿠보역 구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동판에 일본어와 한글로 새겨져 있다.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씨, 카메라맨 세키네 시로씨는 2001년 1월 26일 오후 7시 15분 경. 신오쿠보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발견하고 자신들의 위험을 무릅쓴 채 용감히 선로에 뛰어들어 인명을 구하려다 고귀한 목숨을 바쳤습니다. 두 분의 숭고한 정신과 용감한 행동을 영원히 기리고자 여기에 이 글을 남깁니다. 동일본 여객 철도 주식회사”

2017년 3월 30일에는 도쿄 신주쿠구 주일(駐日) 한국 문화원 소극장에서 의인 이수현 다큐 영화 「가케하시[懸橋]」 특별 시사회가 열렸다. 영화 제목 ‘가케하시’는 떨어진 양쪽을 이어주는 ‘가교’를 가리키는 일본어이다. 「가케하시]」의 공동 제작자인 이토 시게토시는 “한국과 일본을 잇는 다리가 되고 싶어 일본에 온 이씨처럼, 누구나 두 나라 사이의 가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관객들이 영화를 통해 이를 알게 되길 바란다”라고 하였다.

한류와 혐한류가 공존하는 공간

독도와 위안부 사태 이후 도쿄 신오쿠보 코리안타운은 한류와 혐한류가 교차하는 공간이 되었다. 한글 간판과 한국 음식점, 한국 상품을 진열해 놓은 상점가, 한류를 확산하는데 기여한 연예인 사진들이 즐비하였던 신오쿠보 코리안타운에는 한류와 혐한류, 그리고 헤이트 스피치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 2002년 드라마 「겨울연가」로 시작돼 10년간 지속했던 일본 내 한류 열풍은 2012년 8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과거사에 대한 일왕 사과 요구 이후 한일 관계가 경색되면서 급격히 식었다. 더욱이 최근에는 혐한 시위 즉 헤이트 스피치의 대표적인 장소가 되었다. 일본 내 혐한 정서의 뿌리는 깊지만 재일 코리안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가 급증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2002년 북·일 정상 회담 당시 북한이 일본인 납치를 공식 인정한 것이 계기였다. 이와 함께 2007년 결성된 우익 단체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이 재일 코리안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와 혐한 시위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 문제가 되었다. 일본 법무성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15년까지 3년여 동안 일본에서 벌어진 혐한 시위와 가두 행진은 1152건에 달할 정도다. 이러한 헤이트 스피치에 대해 2016년 5월 24일 일본 국회에서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발언] 금지법이 가결되었다.

하지만 ‘헤이트 스피치를 금지한다’는 원칙만 있고 구체적 처벌 조항은 끝내 들어가지 않아 반쪽 짜리 법안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어머니가 재일 한인인 재일 한인 3세 저널리스트 나카무라 잇세[中村一成, 47]는 헤이트 스피치 대책법을 통해 “헤이트 스피치 시위 참가자 일부를 위축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헤이트 스피치 시위에 대한 항의 활동만 억압했던 경찰이 대응을 바꾼 케이스도 있다”고 평가하였다. 한편으로 “시위가 이어지고 있고, 인터넷 상의 차별 선동은 방임된 상태이다. 법 개정과 조례 정비로 금지책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 정부의 조치에 헤이트 스피치는 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지만 근절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 손미경, 『문화플랫폼으로서 도쿄·오사카 코리아타운 연구』(한국외국어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3)
  • 정희선 외, 『재일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형성: 이주와 정주를 중심으로)』(청암대학교 재일코리안연구소, 선인, 2013)
  • 『조선일보』(2017. 4. 1)
  • 『오마이뉴스』(2017. 1. 8)
  • 『조선일보』(2013. 1. 31)
  • 『국제신문』(2016. 6. 6)
  • 『조선일보』(2016. 5. 25)
  • 『서울일보』(2017.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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