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韓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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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세계)/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미국 |
시대 | 현대/현대 |
1960년대 미국으로 이민 온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한 미용 사업의 하나.
1965년 개정된 미국의 「이민 및 민족법」에 따라 전문직과 기술 직종의 자격증을 가지고 있던 전 세계 사람들이 이민의 형태로 미국에 유입되었다. 많은 한국 사람도 새로운 이민법에 따라 미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미국에서는 가발이 크게 붐을 일으켰는데, 그 가발들은 한국에서 수입된 제품이었다. 미국의 「이민 및 민족법」은 1965년 개정되었지만 실제 효력은 1968년 7월 1일부터 발생하였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 초부터 가발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1960년 가발 매출액은 1,000만 달러에 불과하였지만 1969년에는 50배가 증가하여 5억 달러에 달하였다. 미국에서의 가발 붐 때문에 1960년대 한국에서는 한국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미국의 가발 제조업자들에게 수출하였다. 이것이 한인 뷰티 서플라이 사업의 시초였다. 원래 한국 사람들의 머리카락은 검고 거칠기 때문에 가발 재료로서는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염색약이 개발되면서 한국 사람들의 머리카락도 좋은 가발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한국의 수출업자들은 한국 사람들의 머리카락으로 직접 가발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여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가발이 크게 붐을 일으켰는데, 그 가발 제품은 대부분 한국에서 수입한 것들이었다.
한인으로서 가발 사업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송한규인데 1971년 댈러스에서 ‘윅팰리스’라는 상호로 가게 문을 열어 성공하였다. 시카고의 가발 전문 차데 패션(Chade Fashion, Inc.)은 1972년 김종구가 설립한 회사였다. 1986년 이완주가 만든 세븐달러뷰티서플라이는 시카고의 지니, 휴스턴의 벤즈와 함께 캔자스, 오클라호마, 루이지애나, 아칸소 등 미 남서부 지역을 담당하는 3대 한인 미용 재료 도매상으로 발전하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한인들의 가발 사업은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미용 산업의 유행이 바뀌어 가발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한인들 사이에서 경쟁이 심화되자 가발 가격이 크게 떨어졌고 가발 소매업자들의 이익은 대폭 감소하였다. 가발 가격이 낮아져도 가발의 수요가 줄어들자 가발 사업을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고 가방, 보석, 장신구, 모자 등의 상품을 추가로 판매하거나 다양한 물품을 구비하여 잡화상으로 전환, 혹은 의류상이나 신발 가게로 업종을 전환하였다. 다행히 의류, 가방, 보석, 장신구, 신발 등도 한국에서 수입한 상품이었다. 한국의 가발 제조업자들은 봉제 공장이나 신발 공장 등 다른 산업으로 업종을 전환하여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였다.
1980년대 초중반 한인들이 운영하는 매장은 전미 지역에 다양한 형태로 진출하였다. 당시 흑인 대상의 뷰티 서플라이 소매 시장은 70% 이상이 한인이 운영하였다. 2017년 기준 미국 전역에서 흑인을 대상으로 하는 뷰티 서플라이 매장은 6,000~7,000개가 있다. 과거 뷰티 서플라이 매장은 평균 165~198㎡ 규모로 크지 않았으나 최근에는 1,650~1,980㎡, 혹은 초대형인 약 4만㎡ 크기의 매장도 생겨나는 한편, 고객의 다양화 및 매장의 브랜드화와 체인점화도 진행되고 있다. 2016년 9월 발간된 『아프리카계 미국인-인구 및 소비자 지출 동향(African-Americans: Demographic and Consumer Spending Trends』 제10판[10th edition]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흑인의 구매력은 지속적으로 상승했으며, 전문직에 종사하는 흑인의 수도 380만 명에서 480만 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흑인 소비자들이 대형 매장보다는 가깝고 편한 소규모 가게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미국 시장에서 한인 업체들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