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Jae Rin Moon |
---|---|
한자 | 文在麟 |
영문 | Jae Rin Mo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세계)/인물(일반) |
지역 |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
시대 | 현대/현대 |
출생 시기/일시 | 1896년 |
---|---|
수학 시기/일시 | 1913년 |
수학 시기/일시 | 1916년 |
수학 시기/일시 | 1928년 |
수학 시기/일시 | 1973년 5월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8월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3월 6일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7월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5월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
활동 시기/일시 | 1955년 2월 |
활동 시기/일시 | 1971년 12월 |
활동 시기/일시 | 1974년 |
활동 시기/일시 | 1974년 |
활동 시기/일시 | 1977년 |
활동 시기/일시 | 1977년 |
활동 시기/일시 | 1981년 4월 |
몰년 시기/일시 | 1985년 12월 29일 |
출생지 | 함경북도 종성군 화방면 |
거주|이주지 | 북간도 |
거주|이주지 |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
학교|수학지 | 만주 북간도 |
학교|수학지 |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
활동지 | 만주 북간도 |
활동지 |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
묘소 |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 상봉암리 소요산 |
원어 항목명 | Jae Rin Moon |
성격 | 목사|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본관 | 남평(南平) |
1970년대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로 이주하고 한인 이민 사회 선교와 민주화 운동을 한 목사.
본관은 남평(南平). 증조할아버지는 문병규(文秉奎)[1834~1900]이고, 아버지는 문치정(文治政)[1879~1914], 어머니는 박정애(朴貞愛)[1878~1945]이다. 부인은 김신묵(金信默)[1895~1990], 큰아들은 문익환(文益換)[1918~1994], 큰며느리는 박용길(朴容吉)[1919~2011]이며, 작은아들은 문동환(文東煥)[1921~2019], 작은며느리는 문혜림(Faye Moon, Harriet Faye Pinchbeck)[1936~]이다.
문재린(文在麟)[1896~1985]은 1896년에 함경북도 종성군 화방면 녹야에서 태어났다. 1899년 증조할아버지 문병규가 일가 40명을 이끌고 김약연·남종구·김하규 일가와 함께 북간도로 이주하여 문재린도 북간도로 가게 되었다. 1911년에 김하규의 딸 김신묵과 결혼하였다. 1913년에 명동학교 중학 과정을 마치고 1916년에 베이징국립고등사범학교 부속 단급과를 졸업하였다. 1919년 용정 3.13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회 지회의 서기와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에 명동교회와 토성포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문재린은 1928년에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부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토론토대학교에 속한 빅토리아대학교 임마누엘신학교[Immanuel College]에서 공부하고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1932년 귀국하여 그해 8월부터 1946년까지 용정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하면서 은진중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1945년 3월 6일 용정에서 윤동주(尹東柱)의 장례식을 집례하였으며, 광복 직후 용정에서 한인회를 만들어 회장이 되었다. 광복 직전인 1945년 7월, 광복 후인 1945년 10월부터 1946년 4월까지 일제 헌병대와 용정 공산주의자, 소련군 사령부에 의해 체포와 구금을 겪었다.
1946년 5월 용정을 떠나 월남하여 김천 황금정교회와 서울 신암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12월 제주도로 갔다가 거제도로 옮겨 피난민을 지원하며 옥포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953년 9월 서울로 돌아와 2년 동안 강원도 순회 전도에 나서 교회 일곱 곳을 세웠다. 1955년 2월에는 훗날 민주화운동의 한 거점이 되는 서울중앙교회[한빛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61년부터 1971년까지 10년 동안 초교파적 평신도 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문재린은 1971년 12월에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로 이주하여 한인 이민 사회 선교와 민주화 운동을 펼쳤다. 토론토 한인연합교회를 중심으로 교회 생활을 하였으며, 1973년 5월에 빅토리아대학교에서 명예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4년에는 토론토 한인노인회를 창설하였다. 같은 해 토론토 한국민주사회건설협의회 회장을 맡았고,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 및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대한 항의시위와 집회를 벌였다. 1977년에는 민주화를 위한 해외동포 연합조직인 ‘북미주한국민주화연합운동[The United Movement for Democracy in Korea]’과 민주화를 후원하는 외국 교회의 공동체인 ‘한국인권을 위한 북미주연합[North American Coalition for Human Rights in Korea]’ 활동에 참여하였다. 1981년 4월 캐나다에서 귀국한 뒤 1985년 12월 29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김재준을 장례 위원장으로 하여 수유리 한신대학교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저술로는 1927년 『신학지남』9-2[신학지남사]에 수록된 「예수의 죽으심」이 있다.
문재린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 상봉암리 소요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