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Whan Ki K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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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煥基 |
영문 | Whan Ki Kim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인물(세계)/예술인 |
지역 | 미국 뉴욕주 |
시대 | 현대/현대 |
출생 시기/일시 | 1913년 2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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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33년 3월 |
수학 시기/일시 | 1937년 3월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활동 시기/일시 | 1936년 |
활동 시기/일시 | 1936년 11월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4월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
활동 시기/일시 | 1940년 10월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활동 시기/일시 | 1951년 |
활동 시기/일시 | 1952년 |
활동 시기/일시 | 1953년 |
활동 시기/일시 | 1954년 |
활동 시기/일시 | 1956년 5월 |
활동 시기/일시 | 1959년 4월 |
활동 시기/일시 | 1959년 |
활동 시기/일시 | 1959년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
활동 시기/일시 | 1963년 |
활동 시기/일시 | 1964년 10월 |
활동 시기/일시 | 1965년 |
활동 시기/일시 | 1970년 |
활동 시기/일시 | 1971년 |
몰년 시기/일시 | 1974년 7월 25일 |
추모 시기/일시 | 1975년 |
추모 시기/일시 | 1978년 10월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11월 |
출생지 |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
학교|수학지 | 일본 도쿄 |
활동지 | 미국 뉴욕주 |
묘소 | 미국 뉴욕주 발할라 |
원어 항목명 | Whan Ki Kim |
성격 | 추상화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홍익대학교 미술학부장|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초대 학장 |
미국 뉴욕주 지역에서 활동한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추상화가.
김환기(金煥基)[1913~1974]는 한국적 서정과 서구 모더니즘을 결합시킨 추상미술의 선구자로서 1930년대 후반부터 추상미술을 시도하였다. 1950년대에는 전통 기물과 자연을 소재로 한국적 정서를 표현하였다.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석을 계기로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1974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뉴욕에서 작품 세계를 크게 변모시키며 ‘점화(點畵)’를 완성하였다. 1970년에 전면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대상을 수상하였다.
김환기는 1913년 2월 27일 전라남도 신안군 기좌도[현 안좌면]에서 태어났다. 1931년 일본 유학을 떠나 1933년 3월 도쿄 니혼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하였다. 1934년 동료들과 ‘아카데미 아방가르드’를 설립하여 서구 모더니즘을 경험하였다. 1935년 신미술 운동을 주도한 ‘이과회(二科會)’의 일원이 되었고, 1936년에 ‘백만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11월 도쿄 아마기[天城] 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37년 3월에 도쿄 니혼대학 연구과를 수료하였고 같은 해 4월 귀국하였다. 귀국한 해에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추상미술로 접어들었다. 1940년 10월에는 서울 정자옥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을 열었다. 1947년에 유영국, 이규상 등과 ‘신사실파’를 결성하고, 1948년부터 1953년까지 모두 3회의 신사실파전을 개최하였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지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 부산으로 피난하여 해군 종군 화가로 활동하였다. 1952년 제5회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1953년부터 1955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5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의 회원이 되었다. 1956년 5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1959년까지 작품 활동을 하면서 파리와 니스, 브뤼셀 등지에서 제6회 개인전~제10회 개인전을 열었다. 김환기의 1950년대 작품은 「피난 열차」[1951]와 같이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였고, 「달과 항아리」[1952], 「항아리와 여인」[1956], 「산월」[1958] 등에서처럼 전통 기물과 자연 풍경을 주요 소재로 삼기도 하였다. 1959년 4월 귀국하여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장과 홍익미술대학 초대 학장을 지냈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서울에서 제11회 개인전~제14회 개인전을 열었다. 1960년에 유네스코 국제조형예술협회 한국상임위원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61년부터 1964년까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9월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측 커미셔너로 참가하였다가 아돌프 고틀리브의 작품에 예술적 충격을 받고, 귀국하지 않은 채 뉴욕으로 향하였다. 같은 해 10월 뉴욕에 도착한 후 김환기의 작품은 점과 선을 중심으로 한 추상으로 변모해 갔으며, 예술적 실험은 독창적 방식의 ‘점화’를 탄생시켰다. 1964년 9월부터 14개월 동안 록펠러 3세 재단의 지원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 뉴욕 아시아 하우스 화랑에서 제15회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이후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제16회 개인전~제18회 개인전을 가졌다. 1965년에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특별실에 초대되었다. 1971년에는 서울에서 ‘김환기 근작전’을 개최하였으며, 그해부터 1973년까지 뉴욕에서 제19회 개인전~제21회 개인전을 열었다. 1974년 7월 25일 뉴욕에서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1930년대의 주요 작품으로는 「항공표지」[1937]와 「향(響)」[1938], 「론도」[1938] 등이 있고, 1940년대의 작품은 「섬 이야기」 등이 있다. 1950년대의 작품으로 「피난 열차」[1951]와 「판자집」[1952], 「천막」[1952], 「달과 항아리」[1952], 「항아리와 여인」[1956], 「산월」[1958] 등이 있으며, 1960년대의 작품으로는 「27-07-66」[1966]과 「오브제[이파리]」[1968], 「무제 25-07-69 #97」[1969] 등이 있다. 1970년대의 작품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와 「14-12-71」[1971], 「16-10-73」[1973] 등이 있다.
김환기 묘소는 미국 뉴욕주 발할라(Valhalla) 캔시코 묘지[Kensico Cemetery]에 있다.
1970년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전면 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대상을 수상하였다. 1975년 뉴욕 포인덱스터 화랑에서 ‘환기 1961~1974’ 초대 회고전이 열렸으며, 브라질에서는 ‘제13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특별 초대 회고전’이,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김환기 회고전 1936~1974’가 개최되었다. 1978년 10월 은관 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1992년 11월 환기미술관이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서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