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메리

원어 항목명 Me Ri Kim
한자 金-
영문 Me Ri Kim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인물(세계)/예술인
지역 미국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6년
수학 시기/일시 1923년
수학 시기/일시 1928년
수학 시기/일시 1930년
수학 시기/일시 1933년 8월
수학 시기/일시 1934년 6월
수학 시기/일시 1948년
수학 시기/일시 1950년
수학 시기/일시 1953년
수학 시기/일시 1957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1월
활동 시기/일시 1923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1월
활동 시기/일시 1934년 9월
활동 시기/일시 1939년
활동 시기/일시 1946년
활동 시기/일시 1946년
활동 시기/일시 1946년
활동 시기/일시 1978년
활동 시기/일시 1996년
몰년 시기/일시 2005년 2월 9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6년 4월
출생지 서울특별시
거주|이주지 중국 간도 용정
거주|이주지 미국
학교|수학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학교|수학지 미국 미시간주
학교|수학지 미국 미시간주
학교|수학지 미국 뉴욕주
활동지 미국
활동지 서울특별시
활동지 라이베리아
원어 항목명 Me Ri Kim
성격 작곡가|의학 연구원
성별
대표 경력 「학교종」 작곡가|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
정의

미국에서 활동한 의학 연구원이자 동요 「학교종」을 지은 작곡가.

개설

김메리[김몌례(金袂禮), 1906~2005]는 일제 강점기에 미국 유학을 다녀와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음악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광복 후인 1946년에 음악 교과서 편찬에 참여하여 동요 「학교종」[「학교」]을 지었다. 1947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미생물학을 공부하고 병원 실험실에서 근무하였다. 1950년에는 「애국가」와 민요 12곡을 수록한 『한국의 민요[Folk Songs of Korea: Original Folk Melodies and National Anthem]』를 미국에서 출판하였다. 정년퇴직 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미국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김메리는 1906년 서울 승동에서 김익승(金益昇)[1857~1930]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김제식(金悌植)이며, 기독교를 믿게 된 어머니가 메리(Mary)라는 이름을 지었다. 어린 시절 올케에게서 풍금을 배웠다. 승동교회 유치원과 보통학교를 나와 배화학당(培花學堂)에 입학하였다. 배화학당 졸업반이던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교사가 부족해지자 논산의 보통학교에서 임시교사로 6개월간 근무하였다. 같은 해 11월, 교사 생활 후 조혼을 피해 숙부 김익남(金益南)과 함께 간도 용정(龍井)으로 떠나 숙부가 개업한 병원 일을 도우며 교회에서 찬송가 반주를 하였다. 1923년 봄, 서울로 돌아와 이화학당 예과 문과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합창 수업에 참여하고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1925년 이화학당이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칭되어 1928년 3월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1930년 1월 미국 유학길에 올라 샌프란시스코 퍼시픽신학교[Pacific School of Religion]에서 한 학기 동안 공부하며 한인 사회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5월 26일 장인환(張仁煥)[1876~1930]의 장례식에서 조앨리스와 함께 「영별곡」을 불렀으며, 같은 날 저녁 추도회에서 피아노 독주와 애도가 독창을 하였다. 같은 해에 바버 장학금[Barbour Scholarship]을 받고 미시간대학교 음악과에 입학하여 1933년 8월에 음악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1934년 6월 음악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기간에 북미 대한인유학생총회 사교부 임원으로 활동하였고, 학생 행사에서 피아노 연주나 한국 민요의 가야금 반주 등을 통해 한국을 알리고자 하였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 같은 해 8월 하와이에서 열렸던 범태평양여자대회[Pan Pacific Woman's Conference]에 김활란을 대신하여 조선 대표로 참석하였다.

귀국하여 그해 9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그해 12월 조선음악가협회에 참여하였다. 1935년 2월 8일에 정동 모리스 홀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열었으며, 음악 강습회 강사로 활동하였고 여러 음악회의 반주를 맡았다. 1936년 4월 유학 기간 중 약혼한 재미 동포 조오흥(曹五興)[Owen H. Joh, 1894~1975]과 결혼하여 딸 조귀인(曹貴仁)과 아들 조인수(曹仁守)를 두었다. 1939년 제1회 전조선창작발표대음악제에서는 작사·작곡한 「너 어디로」와 「발자취」를 직접 연주하였다.

1943년 12월 일제의 전시 교육 임시 조치령에 의해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육이 중단되자 학교를 떠났다가, 1945년 광복과 함께 학교로 돌아와 음악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946년에는 미군정청 문교부 발행 음악교과서 『초등 노래책-제일이학년 소용』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때 동요 「학교」[「학교종」]를 작사·작곡하여 수록하였다. 1947년 남편 조오흥이 있는 미국 미시간주로 건너가 미시간대학교 대학원에서 음악을 공부하며 대학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베이스 연주자로 활동하였다. 1948년에 웨인주립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50년에는 머시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같은 해 미국에서 악보집 『한국의 민요』[Dubuque, Iowa: W.C. Brown Co., 1950]를 출판하였다. 김메리는 미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한국 민요를 미국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큰 바람이었다고 서문에 썼다. 악보집에는 한국 지도와 한국의 위치·크기·인구·기후·인종·문명·언어에 대한 설명,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악보와 민요 12곡[「아리랑」, 「아리아리랑」, 「노다가게」, 「릴리리야」, 「뽕 따는 아가씨」, 「흥타령」, 「도라지타령」, 「이팔청춘가」, 「박연폭포」, 「양산도」, 「개타령」, 「달아달아」]이 실렸다. 김메리는 악보를 피아노 반주용으로 편곡하였으며, 보표 위아래로 노랫말을 한글 발음의 영문 알파벳 표기와 영문 번역, 한글의 세 가지 방식으로 수록하였다.

1953년 웨인주립대학교 이공 학사로 졸업하였고, 1957년에 웨인주립대학교 이공 석사학위를 받아 병원 실험실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70세로 정년퇴직하였다. 정년퇴직 후 1978년 1월부터 1980년 4월까지 라이베리아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하였다. 라이베리아 ‘망가’ 마을의 병원 실험실에서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화학·생물학 등을 가르쳤다. 생활개선을 위해 여성에게 조끼처럼 만든 브래지어를 보급하였고, 이화여자대학교로부터 숟가락 3,000여 개를 지원받아 주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한국 이민자를 위한 영어 강습과 봉사 단체 조직 등의 봉사활동을 이어 나갔으며, 서예를 배워 서예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1980년 5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1986년 이화여자대학교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였다. 1996년에는 자서전 『학교종이 땡땡땡』을 출간하였으며, 2005년 2월 9일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김메리의 저술 및 작품으로는 「미시간대학(大學)의 녹색(綠色)의 꿈」[『신인문학』2-1, 청마사, 1935]과 「명랑(明朗)한 미시간대학(大學)의 풍경(風景)」[『신인문학』3-3, 청마사, 1936], 「너 어디로」[작사·작곡, 제1회 전조선작곡발표대음악제, 1939], 「발자취」[작사·작곡, 제1회 전조선작곡발표대음악제, 1939], 「학교」[『초등 노래책-제일이학년 소용』,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1946], 『한국의 민요』, 『학교종이 땡땡땡』[현대미학사, 1996] 등이 있다.

참고문헌
  • 군정청 문교부, 『초등 노래책-제일이학년 소용』(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1946)
  • 문교부, 『초등 노래책-1학년 소용』(조선교학도서주식회사, 1948)
  • 이화100년사편찬위원회, 『이화 100년사』(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1994)
  • 김메리, 『학교종이 땡땡땡』(현대미학사, 1996)
  • 김(金)메레, 「미시간대학(大學)의 녹색(綠色)의 꿈」(『신인문학(新人文學)』2-1, 청마사, 1935)
  • 김(金)메리, 「명랑(明朗)한 미시간대학(大學)의 풍경(風景)」(『신인문학(新人文學)』3-3, 청마사, 1936)
  • 장정윤, 「근대 여성음악가 김메리에 대한 기초연구: 1950년대까지의 음악활동을 중심으로」(『한국예술연구』32,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2021)
  • 『동아일보』(1926. 1. 17.|1934. 8. 14.|1934. 9. 20.|1934. 9. 21.|1934. 12. 16.|1939. 6. 7.)
  • 『경성일보』(1930. 1. 30.)
  • 『신한민보』(1930. 5. 29.|1930. 6. 5.)
  • 『조선일보』(1934. 8. 12.)
  • 『중앙일보』(1983. 5. 19.)
  • 『한겨레신문』(1996. 5. 2.)
  • Mary C. Kimm Joh, 『Folk Songs of Korea- Original Folk Melodies and National Anthem』(Dubuque, Iowa: W.C. Brown Co., 1950)
  • 『The Michigan Daily』(1932. 12. 11.|1933. 1. 21.)
  • 『The New York Times』(2005. 2. 11.)
  •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https://www.archives.g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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