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Ki Hwan Hw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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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玘煥 |
영문 | Ki Hwan Hwa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세계)/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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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23년 4월 13일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출생지 | 평안남도 순천 |
활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
활동지 | 프랑스 파리 |
활동지 | 영국 런던 |
원어 항목명 | Ki Hwan Hwang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미국에서 활동하다 파리와 런던에서 한국 독립을 위해 선전 외교 활동을 펼친 독립운동가.
황기환(黃玘煥)[?~1923]은 파리의 한국대표부와 한국통신부에서 프랑스어 잡지를 발간하며 선전 외교 활동을 펼쳤고 런던 한국친우회를 결성한 인물이다.
황기환은 1886년 혹은 188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6년 6월 공립협회 레드랜드지회[1905년 12월 26일 설립]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1917년 4월 미국이 참전을 선언한 후 징병과 아울러 지원병을 모집하자 같은 해 9월 지원병으로 유럽 전선에 참전해 기독교청년회 사업으로 중상자 구호를 담당하였다. 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1919년 6월 3일 파리에 도착한 뒤 김규식(金奎植)이 이끄는 한국대표부 서기장에 임명되어 선전 홍보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규식이 1919년 8월 8일 미국으로 떠나고 위원장 대리 이관용(李灌鎔)이 만국사회당대회 참석차 제네바로 잠시 떠나면서 한국대표부를 이끌었다. 프랑스 신문 『La Petit République(라 프티 레프블리크)』와의 인터뷰에서 3.1운동 이후 일본의 자치나 개혁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일본이 강탈한 권한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이양할 것을 촉구하였다. 부위원장이자 위원장 대리인 이관용이 1919년 10월 10일자로 사임한 후 파리 한국통신부[파리 한국대표부의 후신]의 모든 업무 책임을 맡았다. 무르만스크(Murmansk)에서 철수하던 영국 군대가 한국인 노동자 200명을 후송해 영국 에든버러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해 이들의 귀국 편의를 도왔고, 그 중 35명은 프랑스의 스위프에 정착하도록 만들었다.
1920년 5월부터 1921년 5월까지 잡지 『La Corée Libre[자유 한국]』 1,000부를 프랑스어와 영어로 발행하였다. 1920년 7월부터 파리 외 런던에서도 업무를 수행하였고 같은 해 10월 26일 런던 한국친우회 결성을 도왔다. 같은 해 12월 국한문 혼용으로 된 『구주의 우리 사업』을 간행해 설립 때부터 파리 한국통신부의 대(對) 유럽 선전 외교 활동을 정리하였다. 1921년 6월 23일 파리 한국친우회 결성을 도왔고 이승만(李承晩)의 부름을 받고 1920년 8월 도미해 워싱턴회의를 대비한 지원 활동을 펼쳤다. 1923년 4월 13일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