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Frank William Schofie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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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 Frank William Schofield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세계)/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캐나다 온타리오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89년 3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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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1년 |
활동 시기/일시 | 1968년 |
몰년 시기/일시 | 1970년 4월 12일 |
출생지 | 영국 워릭셔주 럭비 |
거주|이주지 | 캐나다 온타리오주 |
거주|이주지 | 서울특별시 |
학교|수학지 |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
활동지 | 캐나다 |
활동지 | 서울특별시 |
묘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 |
원어 항목명 | Frank William Schofield |
성격 | 의학자|선교사|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서울대학교 교수 |
일제 강점기 3.1운동과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며 한국 독립을 도운 영국 출신의 캐나다 수의학자이자 독립운동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1889~1970]는 수의학자로 있으며 3.1운동 때 만세 시위 현장을 사진 촬영으로 남기는 한편 일제의 탄압 만행을 조사해 전 세계에 알렸고, 일본의 식민 통치를 규탄하며 한국 독립을 도운 인물이다.
아버지는 프란시스 W. 스코필드(Francis W. Schofield)이며 어머니는 미니(Minnie)이다. 4남매 중 막내이며 부인은 앨리스 스코필드(Alice Schofield)이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1889년 영국 워릭셔(Warwickshire) 럭비(Rugby)에서 태어났다. 런던 할리(Harley)칼리지와 쿠퍼스(Coopers)스쿨에서 공부하였다. 고등학교 과정까지 영국에서 마치고 농장 노동자로 일하였다. 1907년 홀로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하여 농장에서 일하면서 토론토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 들어가 세균학을 전공하였고, 1911년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3년 피아노를 전공한 앨리스와 결혼하였다. 1914년부터 모교인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서 세균학 강사로 재직하였다.
1916년 11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올리버 알 애비슨(Oliver R. Avison)의 초청과 권고로 아내와 함께 한국에 오게 되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교수가 되어 세균학, 위생학을 강의하였다. 1917년 선교사 자격 획득을 위한 한국어 시험에 합격하였고, 영어성경반을 조직해 한국인 남녀 학생들에게 영어와 인품 교육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준비 때 민족 대표의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과 비밀리에 만나 민족 거사를 위한 해외 정세 파악과 홍보 임무를 맡고 3.1운동 발발 때 서울 일대의 만세 시위 현장을 사진 촬영하고 이를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19년 4월 5일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 수천리[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 4월 15일 수원군 향남면[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한국인들이 학살되고 한국인 마을이 소실되는 참상을 듣고 4월 18일 직접 현장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현장을 답사한 기록을 「제암리 학살 만행 보고서」라는 제목으로 캐나다 선교본부에 보내 일본의 학살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
1919년 5월 서대문형무소의 여자 감방을 심방하고 일본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중지할 것을 호소했고 『서울프레스(The Seoul Press)』에 일본의 행위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이후 ‘수촌리 학살 만행’, ‘한국에서 일본의 개혁’, ‘한국에서 행해지는 일본의 고문’ 등의 글을 『The Japan Advertiser(재팬 애드버타이저)』, 『The Presbyterian Witness(프레스비테리안 위트니스)』, 『The Globe(글로브)』,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 등지에 기고하며 일본의 식민 통치를 규탄하였다.
1920년 4월 일본의 추방 압력으로 한국을 떠나 5월 캐나다에 정착한 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선전 홍보를 계속하였다. 1958년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뒤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수의병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후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후학을 양성하며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조언과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 4월 12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제암리 학살 보고서」[1919], 「수촌리 학살 보고서」[1919], 『스코필드 자서전』[1968]이 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의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