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Se Heon Che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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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千世憲 |
영문 | Se Heon Che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세계)/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뉴욕주 일리노이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84년 6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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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8월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몰년 시기/일시 | 1945년 6월 14일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출생지 | 경상남도 상주군[현 경상북도 문경] |
활동지 | 미국 뉴욕주 |
활동지 |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
원어 항목명 | Se Heon Cheon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회장 |
일제 강점기 미국 뉴욕과 시카고에서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천세헌(千世憲)[1884~1945]은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회장을 역임하며 독립 의연금을 지원하였고 워싱턴회의와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아버지는 한학을 가르치는 서당 선생으로 알려진 천병우(千秉祐), 어머니는 영월 엄씨(寧越嚴氏)이다. 3형제 중 장남이다.
천세헌은 1884년 6월 29일[흥사단 이력서 기준] 경상남도 상주[현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1903년 하와이로 이민하여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하다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1909년 6월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원 가입과 1916년 10월 19일 흥사단 입단 이후 평생을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에서 활동하였다. 뉴욕에서 식물 상점을 운영하며 1918년 11월 김헌식(金憲植), 신성구, 조병옥(趙炳玉), 이원익(李元翼) 등과 함께 신한회(新韓會) 결성에 참여하였다.
신한회는 1918년 11월 30일 미국 의회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채택해 12월 3일 미국 상원과 국무부를 상대로 외교 활동을 펼쳤고,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고 있는 국무장관 로버트 랜싱(Robert Lansing)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그로 인해 이러한 활동 사실이 12월 4일자 연합통신을 통해 미국 언론에 처음으로 보도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18년 12월 14일~12월 15일까지 뉴욕 맥알핀호텔에서 소약속국동맹회의(小弱屬國同盟會議)가 개최되어 신한회를 대표해 김헌식이 참석할 때 천세헌은 활동 자금을 모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9년 3월 29일 뉴욕의 한인들이 공동회를 열어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를 설립하자 초대 회장이 되어 독립 자금 모금 활동에 앞장섰다.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徐載弼), 이승만(李承晩), 정한경(鄭翰景)의 주관으로 제1차 한인회의가 개최되자 참석해 민찬호(閔贊鎬)·정한경과 함께 ‘대한공화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메시지’를 작성하는 기초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3.1운동의 열기가 미주 지역으로 확대되어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독립 의연금 모금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당시로는 거액인 111.20달러를 의연하였다. 1921년 11월 11일부터 워싱턴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한 뉴욕의 한인들은 1921년 7월 15일 공동회를 통해 천세헌과 조병옥, 임초(林超), 허정(許政), 이원익 5명을 실행위원으로 선정하였다. 그런데 천세헌은 워싱턴회의를 준비하기보다 1927년 9월 자비를 들여 뉴욕을 떠나 상하이[上海]로 갔다. ‘자폭단’과 같은 강렬한 항일 의열 투쟁을 추진하기 위함이었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의열 투쟁 계획이 여의치 않자 대신 국민대표회의 개최 활동에 나섰다. 그리하여 102명이 국민대표회의 소집 청원서를 임시의정원에 제출할 때 적극 동참하였다. 1922년 7월 13일 안창호(安昌浩), 여운형(呂運亨) 등 30여 명이 난국에 빠진 시국 상황을 정돈하고자 시사책진회를 결성할 때 참여했으나 시사책진회가 한 달 만에 해체되면서 활동을 펼치지 못하였다.
천세헌이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위해 활동한다는 소식을 들은 캘리포니아주 다뉴바의 한인들은 1922년 7월 31일 회합을 갖고 8월 1일자로 천세헌을 북미 국민대표회기성회 전권 대표원으로 위임하고 18개 항의 「제의안」을 천세헌에게 보냈다. 18개 항의 「제의안」은 장차 국민대표회의에서 논의할 안건을 정리한 것으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기능과 역할을 개혁하여 임시정부를 더욱 공고히 하고 실효성 있는 정부로 만들어 달라는 다뉴바 한인들의 염원을 담은 것이었다. 천세헌은 상하이에 도착한 이래 처음으로 북미 지역 한인을 대표한 전권 대표원의 공식 직함을 가졌으나 1922년 9월 상하이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감으로써 직접적인 활동을 펼치지 못하였다.
미국 귀환 후 1923년부터 1924년까지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했고, 1925년 7~8월경 뉴욕에서 하던 서양식 음식점[양찬관] 사업을 정리해 시카고로 이거하였다. 1928년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법무원으로 활동했고, 1938년부터 시카고에서 결성한 중국후원회와 조선의용대미주후원회에서 후원 활동을 펼쳤다. 1941년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집행위원장이 되어 독립금 수봉 활동에 앞장섰다. 천세헌은 독립을 얻는 수단으로 항일 무장투쟁의 군사 운동을 주창하였다. 1945년 6월 14일 사망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