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경

원어 항목명 Han Gyeong Chung
한자 鄭翰景
영문 Han Gyeong Chung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세계)/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미국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0년 2월 28일
수학 시기/일시 1912년 6월
수학 시기/일시 1918년 5월 27일
수학 시기/일시 1921년 6월
활동 시기/일시 1962년
몰년 시기/일시 1985년 6월 30일
출생지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면 전산리
거주|이주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활동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활동지 미국 네브래스카주
묘소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원어 항목명 Han Gyeong Chung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미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정한경(鄭翰景)[1890~1985]은 미국에서 활동하며 각종 저술을 편찬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고, 뉴욕 소약속국동맹회의와 파리강화회의, 그리고 워싱턴회의와 샌프란시스코회의 등 각종 국제회의에서 한국인을 대표해 활동하였다.

가계

아버지는 정용복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 2남 1녀 중 둘째 아들이다.

활동 사항

정한경은 1890년 2월 28일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면 전산리에서 태어났다. 고향 순천에 있는 시무학교(時務學校)에 다닐 때 박장현(朴章鉉)박용만(朴容萬)의 지도를 받았고, 1905년 봄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도착한 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인전도관[Korea Mission House]에서 셔먼(Sherman) 부인과 민찬호(閔贊鎬)의 도움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하였다. 박장현박용만이 네브래스카주 커니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스쿨보이 자리를 만들자 1906년 커니로 옮겨 학교를 다녔다.

1908년 5월 어린 학생 신분으로 박용만·박처후(朴處厚)·임동식과 함께 처음으로 한인 청년들의 군사 교육을 의논하였고, 같은 해 7월 덴버의 북미 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의 결의를 거쳐 1909년 6월 커니에 한인소년병학교가 설립되자 1기생으로 참여하여 1911년 8월 졸업하였다. 커니 소재 고등학교에 다닐 때 영문 작문과 연설 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가 탁월한 성적을 거두었고, 이러한 능력 때문에 1911년 6월에 개학한 한인소년병학교에 영문독법 교사로 참여하여 학생들의 토론회를 이끌었다.

1913년 6월 한인 유학생들이 헤이스팅스대학에서 한인학생동맹을 결성하고 영문 잡지 『The Korean Student's Review』[한인 학생 평론]를 발간할 때 평론계 기자로 참여하였다. 1915년 8월 샌프란시스코의 만국박람회에서 열린 이민자대회에서 연설로 큰 호응을 받았고,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가 제1회로 개최한 재미 한인 실업에 관한 한글작문대회에서 3등으로 당선되었다. 중국 유학생 잡지 『The Chinese Students' Monthly(더 차이니스 스튜던츠 먼슬리)』 1918년 5월호에 나라 잃은 한국 상황을 담은 글 「Korea under Japan(코리아 언더 재팬)」을 발표해 재미 중국인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 뉴욕 소약속국동맹회의와 파리강화회의 등 국제대회가 연이어 개최되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임명한 한인 대표로 선정되어 이승만(李承晩)·민찬호와 더불어 뉴욕과 워싱턴 D.C.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선전 외교 활동에 나섰다. 3.1운동의 발발로 한국 문제에 대한 선전 활동의 중요성이 커지자 영문 책자를 연이어 발간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였고, 1921년 4월에 출간한 영문 책자 『The Case of Korea(더 케이스 오브 코리아)』로 같은 해 6월 아메리칸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徐載弼)·이승만과 함께 제1차 한인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한국 독립 문제를 전 미국 사회에 각인시켰고, 서재필이 설립한 대한민국통신부에 외교 협찬원으로, 뒤이어 이승만이 설립한 구미위원부의 위원으로 참여해 미국 각지에서 전개된 한국친우회 결성에 기여하였다. 1921년 10월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세계신문기자대회에 한국에서 온 김동성(金東成)과 한국인 대표로 참석해 연설했고, 1921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해 워싱턴회의 한국대표단의 서기로 임명되어 워싱턴을 중심으로 선전 외교 활동을 펼쳤다.

1925~1927년까지 유일한(柳一韓)의 도움을 받아 서재필과 함께 필라델피아에 유한주식회사를 설립해 부사장으로 경영에 참여하였다. 미일전쟁 직후인 1942년 이승만이 위원장으로 있는 주미외교위원부를 통해 대미 외교에 나섰고,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연합창설대회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전 외교 활동을 펼쳤다.

광복 후 1948년 2월 미 육군 군무원으로 한국에 귀국해 같은 해 5월 실시한 남한 총선거를 감독하는 일을 맡았고, 1949년 1월 대한민국 주일특명전권대사이자 주일한국대표단 단장에 임명되어 도쿄[東京]의 맥아더 사령부와 긴밀한 연락 관계를 도모하고 재일 한국인을 보호하는 활동을 하였다. 1949년 3월 주일특명전권대사직에서 사임한 뒤 같은 해 4월 재일한국인거류민단전국대회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재일한국인거류민단장이 되었다. 1985년 6월 30일 미국 콜로라도주 스프링스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The Oriental Policy of the United States』[1919], 『Korean Treaties』[1919], 『The Case of Korea』[1921], 『The Russians Came to Korea』[1947], 『Korea and the United States through War and Peace, 1943-1960』[2000] 등이 있다.

묘소

정한경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의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신한민보(新韓民報) 영인본』(아세아문화사, 1981)
  •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 독립운동』(연세대학교출판부, 2004)
  • 홍선표, 『자주독립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재미 한인의 꿈과 도전』(연세대학교출판부, 2011)
  • 홍선표 외, 『3.1운동과 국제 사회』(선인, 2020)
  • 홍선표, 「서재필의 독립운동(1919-1922) 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7,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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