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Un Soo Ch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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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雲樹 |
영문 | Un Soo Chu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세계)/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뉴욕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출생 시기/일시 | 1903년 5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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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35년 2월 |
수학 시기/일시 | 1949년 |
몰년 시기/일시 | 1986년 11월 6일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출생지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제오리 |
학교|수학지 | 미국 뉴욕 |
활동지 | 미국 |
묘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
원어 항목명 | Un Soo Chung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미국 전략첩보국 요원|대한해운공사 사장 |
일제 강점기 미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아버지는 정원진이며, 어머니는 구순기이다. 4남 2녀 중 장남이다.
정운수는 1903년 5월 27일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제오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기독교에 입교해 조사(助事)로 활동한 까닭에 기독교인이 되었고 1912년 3월 대구로 이사해 12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제임스 E. 애덤스(James E. Adams)[안의와(安義窩)]가 설립한 대남소학교[1917년 희원소학교로 개명]와 계성학교를 다녔다. 1919년 3.1운동의 영향이 대구까지 미치자 3월 8일 계성학교 2학년생으로 만세 시위에 참가했으나 다행히 일본 경찰에 붙잡히지 않았다. 1920년 8월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여 경신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잠시 마산에 있는 호신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35년 2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같은 해 10월 11일 미국에 도착하여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나 중일전쟁의 발발로 귀국이 어렵게 되자 뉴욕시립대학교에 입학해 귀국을 늦추었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이승만(李承晩)과 만난 인연으로 1942년부터 주미외교위원부에서 이승만 보좌관 겸 서기로 활동하며 『주미외교위원부통신』을 발간하였다.
주미외교위원부가 1942년 2월 27일~3월 1일까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의 협력 속에 워싱턴 D.C.의 라파예트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할 때 대회 전 과정을 참관한 후 「대한인자유대회 보고」라는 제목으로 1942년 3월 12일~5월 21일까지 7회에 걸쳐 『신한민보』에 상세히 알렸다.
1941년 9월부터 이승만이 항일 군사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미국 전략첩보국[OSS]을 상대로 한인 청년들을 미군에 입대시키는 작업을 추진하자 1942년 3월 미 육군 입대를 지원하였다. 그렇지만 실제 입대한 날은 1943년 6월 8일이었다. 미 육군훈련소에서 사병으로 4개월간 기초 훈련을 받았고 다시 장교가 되기 위해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있는 간부후보생학교에서 4개월 군사 교육을 더 받고 1944년 2월 미 육군 항공 소위로 임관하였다.
임관 직후 2월 7일부터 3월 31일까지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Harrisburg)에서 정보 과정을 이수해 정보 장교가 되어 운남성(雲南省) 쿤밍[昆明]에 있는 미국 육군의 중국전구 항공대에 배속되었다. 충칭[重慶]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군사 교류 임무를 수행하였고, 그러한 결실로 1945년 5월부터 한국광복군과 미국 전략첩보국 간 한미 합작의 한반도 침투를 위한 첩보 공작 훈련인 독수리 작전을 성사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관계로 독수리 작전을 수행하는 통역 요원이자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일본의 항복으로 한반도 침투 공작이 중단되자 미국 전략첩보국 요원의 한 사람으로 이범석(李範奭)이 이끄는 한국광복군 국내 정진대와 함께 1945년 8월 18일 시안[西安]을 떠나 같은 날 12시경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광복된 한국의 정국을 조선총독부로부터 가장 먼저 인수하기 위한 시도였으나 조선총독부의 서울 진입 거부로 그다음 날인 8월 19일 귀환하였다.
한국에 들어온 뒤에는 미 제24군단 정보부의 한국 책임자로 근무했고, 1947년 10월 3일 미군에서 제대하였다. 제대 후 미국에서 공부를 재개해 1949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승만 정부의 부름으로 다시 한국에 귀국해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역임했고, 미국 펜솔루회사 한국지부, 남산관광주식회사 등에서 일하였다. 1986년 11월 6일 사망하였다.
정운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의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