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Cho 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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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超 |
영문 | Cho Im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세계)/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뉴욕주 일리노이주 시카고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85년 4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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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08년 10월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2월 8일 |
몰년 시기/일시 | 1969년 11월 2일 |
추모 시기/일시 | 2015년 |
출생지 | 평안남도 정주군 마산면 청향리 24통 6호 |
활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
활동지 | 미국 뉴욕주 |
활동지 |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
원어 항목명 | Cho Im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회장|뉴욕 재만동포옹호회 회장 |
일제 강점기 미국 뉴욕과 시카고를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임초는 1885년 4월 28일 평안남도 정주군 마산면 청향리 24통 6호에서 출생하였다.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신흥학교(新興學校)에서 공부했고 1907년경 이승훈의 권유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다. 선천(宣川) 신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조선총독부가 조작한 소위 데라우치 암살 미수 사건이라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다. 1911~1912년까지 일본 경찰의 고문을 받고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8년형을 구형 받았으나 1913년 2월 최종 무죄로 확정되어 석방되었다.
1913년 9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1914년 대한인국민회 클레어몬트지방회에 입회하였고, 업랜드의 초등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클레어몬트 한인학생양성소의 영어 강습소 간사로 활동하였다. 1916년과 1917년에 하기 방학을 이용해 개학한 유년하기강습소에서 교사로 봉사하며 어린 한인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917년도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나성지방회] 대표원에 선정되었으나 사면하고 오하이오주 애크런에 가서 1919년 1월 대한인국민회 애크론지방회 설립을 청원해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애크런에서 뉴욕으로 이거한 직후인 1919년 3월 29일 뉴욕의 한인들과 공동회를 개최해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를 설립하고 대의원에 선임되었고, 1921년도에는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회장이 되었다. 같은 해 4월에는 구미위원부 위원장 현순(玄楯)의 주미 공사관 설립 문제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서 분란이 일어나자 조병옥(趙炳玉)과 함께 뉴욕 한인공동회의 대표자가 되어 분쟁을 해결하였다.
현순에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이 된 서재필(徐載弼)이 1921년 11월에 개최될 워싱턴회의를 대비하기 위한 선전 외교 활동과 재정 모금 활동을 계획할 때 같은 해 7월 15일 뉴욕 한인공동회를 개최하였다. 뉴욕 한인공동회에서 각지 동포들에게 연락하고 선전 활동과 재정 모집을 펼치기 위한 5명의 준비 위원 중 한 사람이 되었고 그 가운데 특별히 서재필에 의해 수전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수전 위원으로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최진하(崔鎭河)와 함께 9월부터 11월 초까지 미국 각지를 순방하며 재정 모금 활동을 펼쳐 1만여 달러의 거금을 모금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22년에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대의원, 1923년도 법무원으로 활동했고 1928년 2월 8일 동지회, 교민단, 근화회(槿花會) 대표들과 재만 동포를 돕기 위한 뉴욕 재만동포옹호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다.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 침략을 계기로 독립의 열기가 크게 고조되자 1932년 2월 14일 뉴욕 한인공동회를 개최하고 연합회를 조직해 위원으로서 항일 운동을 펼쳤다.
1933년경 시카고로 이거한 뒤 1940년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집행위원장이 되었고 같은 해 5월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이동녕(李東寧)의 추도식을 주례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교육 위원이 되어 한인 2세 아동의 국어 학교를 장려하며 지원하였고, 광복군 후원금, 독립금 등을 의연하며 한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1969년 11월 2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사망하였다.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