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Se U Ye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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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廉世雨 |
영문 | Se U Yeom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세계)/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캘리포니아주 뉴욕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73년 1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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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4년 11월 29일 |
몰년 시기/일시 | 1923년 8월 23일 |
추모 시기/일시 | 2017년 |
출생지 | 강원도 김화군 군내면 천동 |
거주|이주지 | 미국 하와이주 |
거주|이주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거주|이주지 | 미국 뉴욕주 |
묘소 | 미국 뉴욕주 마스페스 그랜드 애비뉴 6540 |
원어 항목명 | Se U Yeom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총무 |
일제 강점기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염세우는 1873년 강원도 김화군 군내면 천동에서 태어났다. 1904년 11월 17일에 일본 고베[神戶]에서 시베리아호를 타고 11월 29일 노동 이민을 목적으로 미국 하와이 호놀롤루에 도착하였다. 1906년경 염세우는 미국 본토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해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였다. 1910년 3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단장 오운(吳雲)을 비롯한 단원 29명과 권업동맹단(勸業同盟團)을 결성할 때 참여하였다. 권업동맹단은 농산물 및 식료품 등에 투자해 경제적 기반을 다져 장차 국권 회복을 위한 방편으로 삼을 목적으로 결성한 후 1914년 투자 자본금 4만 달러를 확보하는 등 사업을 본격화했으나 1915년에 들어서면서 유명무실해졌다.
1917년 3월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대한인국민회 나성지방회]에서 회장 이영수를 대신해 잠시 회장 대리 임무를 맡았다.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하기로 하면서 홍치범(洪治範)을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대표로 파견하기로 결의할 때 경비 후원을 위한 수전 위원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재미 한인 사회에 독립운동의 열기가 크게 고조될 때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 위국 헌신을 맹세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것을 높이 평가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염세우의 애국 충정을 중앙총회에 소개하였다.
1919년 8월 이승만(李承晩)이 워싱턴 D.C.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를 설립하고 초대 위원장에 김규식(金奎植)을 선정한 후 본격적인 독립 공채 모집 활동에 들어가자 같은 해 10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전진·염달욱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지방 공채 모집 위원이 되었다. 1920년 3.1절 기념식을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주최로 개최할 때 임시정부 헌법의 낭독과 연설로 독립 선언을 경축하였다. 1921년경 뉴욕으로 이거한 뒤 1923년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총무가 되었고, 같은 해 3.1절 기념행사 때 연설로 독립 선언의 의미를 경축하였다. 1923년 8월 23일 뉴욕에서 향년 50세로 사망하였다.
염세우 묘소는 미국 뉴욕주 마스페스 그랜드 애비뉴 6540의 마운트올리벳 묘지[Mount Olivet Cemetery]에 있다.
201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