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광섭

원어 항목명 Gwang Seop Yeom
한자 廉光燮
영문 Gwang Seop Yeom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세계)/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5년 12월 5일
수학 시기/일시 1916년
수학 시기/일시 1919년
활동 시기/일시 1924년 7월 27일
몰년 시기/일시 1981년
출생지 서울특별시
활동지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묘소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원어 항목명 Gwang Seop Yeom
성격 개신교 목사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미국 시카고 지역에서 활동한 한인 목사.

개설

1916년부터 미국 미시시피(Mississippi)주, 켄터키(Kentucky)주, 조지아(Georgia)주 애틀랜타에서 신학 등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 취득 후 시카고대학 심리학과 도서실장으로 근무하다가, 1943년에 시카고대학의 교수가 된 한인 목사이다.

활동 사항

염광섭(廉光燮)[1895~1981]은 1895년 12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914년 유학차 도미하여 1924년 7월 27일 설립된 시카고 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에서 장세운과 함께 전도사로 선발되어, 1928년 말까지 3년 5개월간 담임목사 김창준, 전도목사 조희염 등과 활동하였다. 1926년 1월 1일 저녁 6시 이사 김경(金慶)이 경영하는 워싱턴 카페테리아에서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신년 축하회에서는 양득의 애국가, 김경의 개회사에 이어 ‘객지에 당하는 송구영신’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이후 주미 학생회 회장으로서 학생들의 전도를 위해 샌프란시스코[상항(桑港)]와 로스앤젤레스[나성(羅城)]를 방문하였다. 시카고 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 이사부 부장이던 1931년 2월에는 당시에 목사로도 칭하던 임시 담임 교역자로 선정되었고, 목회 기간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은 예배당을 마련한 것이었다. 미국 북감리교회가 1만 4000달러에 매입한 애비뉴 가옥을, 시카고 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가 예배당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1947년 2월에 당시 미군정청의 고문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고,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81년 향년 86세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미국 유학 시절 북미 대한인유학생총회『우라끼[The Rocky]』를 발간하여 일제 강점기 식민지 지식인과 유학생들의 지식 습득 등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염광섭은 사회주의 계열에서 주장한 인간 해방은 개신교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인식하고, 사회주의를 “허황한 행동과 타인의 덕으로 안전한 생활을 득하려는 비루한 사상”이라고 비판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 자료집』8(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 김욱동, 『아메리카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북미 조선학생총회와 〈우라키〉』(이숲, 2020)
  • 「선교 한국 그 역사를 찾아서(75. 염광섭)」(『미주크리스천신문』, 2019.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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