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Jeong Su 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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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鼎洙 |
영문 | Jeong Su A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세계)/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캘리포니아주 뉴욕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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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897년 |
활동 시기/일시 | 1903년 1월 13일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7월 25일 |
몰년 시기/일시 | 1940년 7월 29일 |
추모 시기/일시 | 2015년 |
출생지 | 충청남도 보령군 |
거주|이주지 | 미국 하와이주 |
활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
활동지 | 미국 뉴욕주 |
원어 항목명 | Jeong Su An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미국 하와이와 뉴욕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안정수(安鼎洙)[1879~1940]는 하와이 첫 이민자들을 위한 통역자이며 신민회(新民會)와 뉴욕 한인공제회를 결성하여 국권 회복을 추진하였고,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에서 각종 의연금을 의연하며 한국 독립에 헌신한 인물이다.
안정수는 1879년 충청남도 보령군에서 태어났다. 조지 허버 존스(George Herber Jones) 목사가 시무하는 인천 내리교회의 권사로 엡윗청년회에서 활동하며 교회 부속의 영화학교(永化學校)에서 초급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근무하였다. 데이비드 W. 데슬러(David W. Deshler)가 하와이 이민자를 모집하기 위해 설립한 동서개발회사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다 1902년 12월 22일 첫 이민자가 제물포항을 떠나 1903년 1월 13일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에 도착할 때 통역 겸 사무원으로 탑승해 하와이로 건너갔다.
1903년 11월경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우병길(禹炳吉), 이교담(李交倓), 임치정(林蚩正) 등과 국권 회복을 위한 해외 최초의 민주적인 정치 조직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03년 11월 3일 미주 최초로 한인 교회의 기반이 된 한인감리교선교회를 조직하였고 1904년 4월 1일 한인감리교선교회를 토대로 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1904년 말경 또는 1905년 초 미국 본토로 이거해 1905년 9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국 북감리교 연회에서 박용만(朴容萬)과 함께 한인 전도사로 임명되어 순회 전도 활동을 펼쳤다.
1907년 7월 25일 뉴욕에서 황용성·서필순·이원익·신성구·김승제 등과 한인공제회를 설립하였다. 뉴욕 한인공제회는 일본 영사가 뉴욕에서 한인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한인들을 조사하려는 것에 반발해 설립한 것으로 한인들의 단합을 도모해 일본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배제하기 위함이었다. 하와이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와 미국 본토의 공립협회(共立協會)·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로 나뉘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07년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주 한인 사회를 합동할 것을 촉구하는 의견서를 제의하였다. 이러한 합동 제의는 1909년 2월 국민회 설립으로 이어졌다.
1917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상업상의 이유로 잠시 귀국했는데 한국에 있는 동안 3.1운동을 목도한 것을 계기로 미국에 돌아와 3.1운동의 진상과 의미를 알리는 연설로 재미 한인들의 독립 정신을 일깨웠다. 1919년 6월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열린 미국 감리교 선교 100주년 기념대회에 한국 측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4월 뉴욕 한인교회 설립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고, 설립 직후 교회 건물 구입을 위한 기금 모집 위원으로 모금 활동을 성공적으로 펼쳐 1923년 7월 뉴욕 한인교회 헌당식을 가졌다.
미국과 국내에 있는 한인들의 실업 발달과 한인 실업인들 간의 친선을 도모하고자 1927년 6월 12일 뉴욕의 유지들과 유미조선인산업협회를 발기하였고, 1928년 경영상 어려움에 처한 국내 정신여학교를 도와 여성 교육을 장려하기 위해 뉴욕 유지 한인들과 특별회를 결성해 위원장으로서 모금 운동을 전개해 1,000달러의 기부금을 모았다. 1929년 8월 컬럼비아대학교 정문 앞에 있는 뉴욕 한인교회의 새 건물을 마련하는 데에 거금 1,500달러를 의연하여 뉴욕 한인교회가 교회로서뿐만 아니라 뉴욕 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지가 되는 데 기여하였다.
북미 대한인유학생총회의 영문 잡지 발간을 위해 50달러를 의연한 것을 비롯해 국내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돕는 후원금 모금 활동을 도왔다. 1935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李東輝)의 사망 소식에 뉴욕 한인들과 추도회를 개최해 추모하였고, 인구세, 정부 후원금, 광복군 후원금 등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38년도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실업부원, 같은 해 9월 대한인국민회총회 시사 위원, 1939년도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구제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독립을 도왔다. 1940년 7월 29일 미국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