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Jae Pil Se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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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載弼 |
영문 | Jae Pil Seo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세계)/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64년 1월 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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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883년 5월 |
수학 시기/일시 | 1884년 7월 |
수학 시기/일시 | 1886년 9월 |
수학 시기/일시 | 1888년 6월 |
수학 시기/일시 | 1889년 |
수학 시기/일시 | 1892년 3월 |
수학 시기/일시 | 1926년 9월 |
수학 시기/일시 | 1927년 4월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4월 7일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4일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4월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9월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7월 1일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7월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7월 |
몰년 시기/일시 | 1951년 1월 5일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출생지 |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 |
거주|이주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
학교|수학지 | 미국 뉴욕주 뉴욕시 컬럼비아대학교 |
학교|수학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대학교 |
활동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
묘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 |
원어 항목명 | Jae Pil Seo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미군정청 수석 고문 |
일제 강점기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이자 의사.
호는 송재(松齋). 아버지는 서광효(徐光孝)이고 어머니는 성주 이씨(星州李氏)이다.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재필(徐載弼)[1864~1951]은 1864년(고종 1) 1월 7일 전라남도 동복군 문전면 가천리[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태어났다. 7, 8세경 서울로 상경하여 외숙부 김성근의 사숙에서 과거 공부를 한 후 1882년(고종 19) 병과 3등에 급제하였다. 이후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 교류하며 개화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1883년(고종 20) 5월부터 1884년(고종 21) 7월까지 일본 도쿄에 있는 도야마육군하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하였다. 1884년 10월 조련국(操鍊局) 사관장이 되었고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켜 자주(自主)와 자강(自强)의 국가 건설을 추진하였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였다.
일본으로 망명한 직후 1885년(고종 22) 4월 미국으로 건너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녔다. 1886년(고종 23) 9월부터 1888년(고종 25) 6월까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해리힐먼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에 다녔다. 1889년(고종 26)부터 1892년(고종 29) 3월까지 컬럼비아대학교 의학부에서 수학하였다. 1892년 3월 한국인 최초로 의사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 12월 조선 정부의 부름에 응해 귀국해 1896년(고종 33) 4월 7일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간하였고 독립협회, 독립문, 독립공원을 설립하였으며,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근대 민중 계몽운동을 펼쳤다. 이 일로 한국에서 추방되어 다시 미국에 돌아간 후 인쇄업을 시작하여 필라델피아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1905년(고종 42) 7월 이승만(李承晩)과 윤병구(尹炳求)가 러일 강화 회의를 대비하여 필라델피아를 방문하였을 때 외교문제를 협의하며 활동을 도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대한인국민회에 한국 문제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영문 잡지 발간을 제의하였으나 재정 부족을 이유로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3.1운동 발발 소식을 듣고 이승만·정한경(鄭翰景)과 함께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재미 유학생들과 주요 한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해 6개의 결의문을 작성하여 발표하고 시가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1919년 4월 말 필라델피아에 대한민국통신부를 설립하여 『Korea Review[한국 평론]』라는 영문 잡지를 1922년 7월까지 매월 발간하였고, 한국 독립 문제를 다룬 각종 영문 책자 발간과 미국 각지의 순회강연 등으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미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 문제를 돕는 한국친우회를 1919년 5월 필라델피아에 설립한 것을 비롯해 미국 각지에 21개의 한국친우회를 결성하였다.
1921년 4월 현순(玄楯)의 후임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이 되어 11월부터 시작되는 워싱턴회의를 준비하였다. 1921년 9월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워싱턴회의 한국대표단 부단장에 임명되어 선전 외교 활동을 펼쳤다. 1925년 7월 1일부터 14일까지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태평양회의에 참가해 한국대표단의 위원장으로 한국의 주권 문제를 거론하며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25년 4월 유일한(柳一韓)의 지원으로 이희경(李喜儆)·정한경(鄭翰景) 등과 필라델피아에 유한주식회사[New Il-han&Company Inc.]를 설립해 운영하였다. 1926년 9월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에 특별 학생으로 입학해 공부한 후 의사로 복귀하였다.
1922년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고국의 『동아일보』·『조선일보』 등과 미국 내 『신한민보』에 수많은 글을 써 국내외 한인들의 단합을 호소하고 강인한 독립 정신으로 장차 독립을 대비한 실력을 양성할 것을 당부하였다. 광복 직후 1947년 7월 미군정청 수석 고문이자 과도정부 특별 의정관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와 민주주의 국가 건설과 민족 통일을 위한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1948년 9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1년 1월 5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노리스타운에서 사망하였다.
서재필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의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