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양

원어 항목명 Jeong Yang Park
한자 朴定陽
영문 Jeong Yang Park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세계)/인물(일반)
지역 미국  
시대 근대/개항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1년 12월 24일
수학 시기/일시 1864년
수학 시기/일시 1866년
활동 시기/일시 1879년
활동 시기/일시 1881년
활동 시기/일시 1887년
활동 시기/일시 1895년
활동 시기/일시 1898년
몰년 시기/일시 1905년
추모 시기/일시 1904년
출생지 서울특별시
활동지 미국
원어 항목명 Jeong Yang Park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반남(潘南)
대표 경력 주미 전권공사|내부대신
정의

개항기 총리대신서리 등을 역임하고 1887년 조선 첫 주미 전권공사에 임명된 문신.

가계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치중(致中), 호는 죽천(竹泉). 아버지는 조선 후기의 문신 박제근(朴齊近)이다.

활동 사항

박정양(朴定陽)[1841~1905]은 1841년(헌종 7) 12월 24일에 조선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864년 증광과 생원시 병과에 입격[성균관 유생]하였다. 1866년(고종 3)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1879년에 형조참판을 지냈다. 1881년에는 홍영식과 어윤중, 조준영, 조병직 등과 함께 신사유람단으로 활동하였으며 귀국하여 개화 정책 추진에 참여하였다. 1882년에 성균관 대사성과 이조참판, 좌승지를 지냈으며 1887년에는 주미 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다. 조선의 첫 미국 대사 파견으로 조선의 자주 독립국 승인을 요청하였으며, 미국은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이 아닌 동등한 외교국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청의 압력으로 1889년에 귀국하였고, 귀국 후에는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1894년에 군국기무처가 신설되자 회의원(會議員)으로 활동하다가 김홍집 내각의 학무 대신이 되었고, 이듬해인 1895년 김홍집 내각 붕괴 후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이 살해되자 총리대신서리와 궁내부 대신서리를 겸직, 이후 참정대신이 되었다. 1898년 만민공동회에 참석해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수구파와 위정척사파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904년 9월 표훈원 총재(表勳院總裁)로 임명되었다. 1905년(고종 42) 11월에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무효와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사형을 주장하였으며, 같은 달에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박정양의 주요 저서로는 『죽천고(竹泉稿)』와 『해상일기초(海上日記草)』, 『동서계 (同書啓)』가 있고, 편저로는 『일본내무성급농상무성시찰서계(日本內務省及農商務省視察書啓)』와 『일본내무성시찰기(日本內務省視察記)』, 『일본농상무성시찰기(日本農商務省視察記)』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04년 태극훈장(太極勳章)을 받았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참고문헌
  • 『동학란기록』상(국사편찬위원회, 1974)
  • 최강현 역, 『박정양, 조선시대 포쇄일기』(신성출판사, 1999)
  • 「130년전 조선 외교관 눈에 비친 미국은 어땠을까」(『연합뉴스』, 2018.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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