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양목

원어 항목명 Yang Mok Mun
한자 文讓穆
영문 Yang Mok Mu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세계)/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미국 캘리포니아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9년 6월 7일
활동 시기/일시 1914년
몰년 시기/일시 1940년 12월 25일
추모 시기/일시 1995년
출생지 충청남도 서산군 남면 몽대리
거주|이주지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활동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원어 항목명 Yang Mok Mun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미국에서 대동보국회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문양목(文讓穆)[1869~1940]은 국내에서 동학 접주로 동학농민군에서 활동하였고 도미 후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대동신서관, 한글학교 등을 통해 한국 독립에 앞장선 인물이다.

가계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우운(雩雲). 자는 승렬(承烈) 또는 성렬(聖烈). 아버지는 문상도(文尙道), 어머니는 순흥 안씨(順興安氏)이다. 2남 중 차남이다.

활동 사항

문양목은 1869년 6월 7일 충청남도 서산군 남면 몽대리[현 태안군 남면 몽산2리] 268에서 태어났다. 동학 접주로 1894년 10월 동학 농민군의 태안 전투에 참가한 후 관군에 체포되었으나 친구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탈출해 1903년 인천으로 피신하였다. 서당 교사로 활동하면서 하와이 노동 이민 모집 광고를 보고 하와이 이민선 콥틱(Coptic)호를 타고 1905년 2월 2일 호놀룰루에 도착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였다.

1906년 미국 본토인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동학 접주 출신인 백일규(白一圭)를 비롯해 대동교육회(大東敎育會)의 장경(張景)·방사겸(方四兼) 등과 교류하였다. 1907년 3월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결성되자 같은 해 10월 중앙회장과 『대동공보(大同公報)』의 사장 겸 발행인이 되어 지방회를 설립하고 동포의 국권 회복 의식을 고취하였다.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 고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일본의 한국 침략 정당성을 주장하자 3월 22일 한인공동회에서 선임한 4인 총대 중 한 명으로 스티븐스의 망언을 규탄하였다. 1908년 3월 23일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 의거가 일어나자 재판후원회를 결성하여 재판을 적극 도왔다.

1908년 4월 『대동공보』가 폐간되자 활자 제구를 수습해 로스앤젤레스에 대동신서관을 설립하였다. 여기서 1910년 3월 이승만(李承晩)이 한성 감옥에서 쓴 『독립정신』과 1911년 7월 4일 박용만(朴容萬)이 쓴 『군인수지(軍人須知)』를 편찬하였다. 1910년 2월 10일 대동보국회가 국민회에 흡수 통합되어 대한인국민회로 바뀐 뒤 1911년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에 선출되었고 네브래스카(Nebraska)주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던 박용만『신한민보』 주필로 초빙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설립 기반을 닦게 하였다.

1914년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1916년 맨티카(Manteca)에서 대한인국민회 맨티카지방회 대의원과 한인 아동의 한글과 역사를 가르치는 한흥학교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도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나 사면하는 대신 샌프란시스코 한인학교의 교사로 봉사하며 한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1940년 12월 2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맨티카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신한민보(新韓民報) 영인본』(아세아문화사, 1981)
  • 최재학, 『독립운동가 문양목 평전』(문양목선생기념사업회, 2015)
  • 홍선표, 『재미 한인 독립운동을 이끈 항일 언론인 백일규』(역사공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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