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섭

원어 항목명 Young Seop Kim
한자 金永燮
영문 Young Seop Kim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인물(세계)/종교인
지역 미국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8년
수학 시기/일시 1923년
활동 시기/일시 1930년대
활동 시기/일시 1930년대
활동 시기/일시 1939년
몰년 시기/일시 1950년
출생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학교|수학지 미국 코네티컷주 하드퍼드
활동지 황해도 연안군
활동지 서울특별시
활동지 미국 하와이주
원어 항목명 Young Seop Kim
성격 목사
성별
대표 경력 주호놀룰루 총영사|서울정동제일교회 목사
정의

8.15광복 이후 미국 하와이 주재 총영사로 활동한 감리교 목사.

활동 사항

김영섭(金永燮)[1888~1950]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경기도 강화[현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나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 이후 학교가 폐쇄되어 강화 보창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황해도 연안군의 봉남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연안군에서 개신교 신자가 된 김영섭은 일본 와세다대학 문과와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서 수학한 후 미국에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1923년 미국 하트퍼드신학교[Hartford Seminary]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목사 안수를 받고 1927년 귀국하여 서울정동제일교회와 서울중앙감리교회, 인천내리교회 등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1930년대에 신흥우(申興雨)가 조직한 적극신앙단에 참여하였고, 흥업구락부사건(興業俱樂部事件)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흥업구락부사건 이후 김영섭을 포함하여 많은 개신교 인사들이 전향하였다. 1938년 당시 경성기독교연합회 부위원장인 정춘수가 앞장서서 감리교 내선일체를 위해 7인 특별위원회를 조직하였을 때 김영섭도 참여하였으며, 1939년에 도쿄에서 조선과 일본의 감리교단 통합을 논의하는 회의가 개최되었을 때는 정춘수와 신흥우, 양주삼, 유형기 등과 함께 전권위원으로 참석하였다. 8.15광복 후 주호놀룰루 총영사로 잠시 근무하였다가 귀국 후 서울중앙감리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1950년에 사망하였다.

사상과 저술

광복 후 감리교단 내부에서 친일 청산을 둘러싸고 재건파와 부흥파로 분열이 일어났을 때, 인천내리교회 담임목사였던 김영섭은 친일 행적이 뚜렷한 목회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었다. 2005년 기독교 대한감리회가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펴낸 자료집에 친일 부역자 12인의 명단에 포함되어 있으며,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참고문헌
  • 『정동제일교회 90년사(貞洞第一敎會90年史)』(정동교회 역사편찬위원회, 1977)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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